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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숲 Nov 22. 2020

시애틀행 버스 창에 기대 듣는 노래

노래의말들 #29 영화 '만추'

* 아래 링크에서 방송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차가운 감옥에서 7번째 가을을 맞았을 때였어요. 애나는 잠시나마 그곳을 나올 수 있었죠. 어머니의 장례식이 있었거든요. 교도소를 나서는 그녀의 얼굴엔 표정이 없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72시간. 장례를 마치곤 바로 다시 돌아와야 했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급하게 한 남자가 버스에 올라탑니다. 그의 이름은 훈입니다. 코트 깃을 세우고 머리도 한껏 올린 한국인. 훈은 다짜고짜 애나에게 “지갑을 잃어버려서요 혹시 30불만 빌릴 수 있을까요?”라고 하죠. 애나는 마지못해 돈을 빌려주고 버스에 탄 훈은 갚을 필요 없다는 애나의 옆자리로 굳이 가서 자신의 손목시계 줍니다. “돈 갚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요. 저한테 아주 소중한 물건이거든요”라는 말고 함께. 사실 훈은 쫓기고 있었어요. 여자들과 데이트를 하는 일로 돈을 버는 훈을 한 손님의 남편이 눈에 불을 켜고 쫓고 있었죠. 도망갈 수 없는 여자와 도망치고 있는 남자가 탄 버스가 천천히 시애틀로 향합니다. 

 


선우정아 '도망가자'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 말자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 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너라서 나는 충분해 

나를 봐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시애틀엔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죠. 훈은 빌려준 시계를 빌미로 애나와 만날 구실을 만들려고 하지만 애나는 훈이 적어준 전화번호를 쓰레기통에 버리곤 헤어집니다. 다시 각자의 공간. 애나의 집엔 어머니의 유산을 나누던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고요. 훈은 남편을 떠나 자신을 찾아온 여자 손님과 잠자리를 갖습니다. 

두 번째 만남은 헤어진 지 하루도 채 안돼서였어요. 돌아가는 버스 매표소 앞에서 줄을 섰다가 차례가 오면 다시 맨 뒤로 가기를 반복하는 애나 앞에 훈이 나타났습니다. 능글능글 갚을 돈을 내미는 훈에게 어떤 일을 하냐고 애나가 묻자 훈은 이렇게 답하죠. 


“손님이 원하는 건 뭐든이요. 데이트도 하고. 춤도 추고 파티도 가고. 좋은 남자를 원하면 좋은 남자가 돼주고. 나쁜 남자를 원하면 나쁜 남자가 되죠. 손님이 만족할 때까지. 맘에 안 들면 돈 안내도 돼요. 그쪽도 같이 있는 게 낫지 않아요" 이렇게 둘의 동행이 시작됩니다. 

  


김동률 '동행'


네 앞에 높여진 세상의 짐을 대신 다 짊어질 수 없을지는 몰라도

둘이서 함께라면 나눌 수가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꼭 잡은 두 손이 나의 어깨가 네 안의 아픔을 다 덜어내진 못해도

침묵이 부끄러워 부르는 이 노래로 잠시 너를 쉬게 할 수 있다면

네 앞에 높여진 세상의 벽이 가늠이 안될 만큼 아득하게 높아도

둘이서 함께라면 오를 수가 있을까 그럴 수 있을까

내일은 조금 더 나을 거라고 나 역시 자신 있게 말해줄 순 없어도

우리가 함께 하는 오늘이 또 모이면 언젠가는 넘어설 수 있을까

둘이 향한 놀이동산은 문이 닫혀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범퍼카를 탈 수 있었죠. 멀리 있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외국인 연인의 대사를 지어서 주고받고, 시장을 뛰어다니는 사이 밤이 깊었습니다. 밤이어서 일까요? 애나가 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훈은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로요. 그날 그러니까 7년 전, 남편에 폭력을 당해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는 사실을 애나가 알게 된 날. 그날은 원래 애나가 과거에 사랑했던 한 남자와 도망치기로 했던 날이었죠. 동네에서 함께 나고 자란 오빠의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애나는 감옥에 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훈은 가만히 들어줍니다. 훈이 아는 유일한 중국어인 하오 (좋다), 화이(나쁘다)라는 말로 맞장구까지 쳐주면서 말이죠. 그때 함께 도망가자는 그 남자의 말은 거짓말이었을까. 곱씹고 곱씹는 사이 애나의 7년이 흘렀고, 지금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서툰 중국어로 내 말을 들어주는 이 남자는 대체 누굴까 생각하는 사이 밤이 조금 더 깊어졌습니다.

 


이적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다시 돌아올 거라고 했잖아 잠깐이면 될 거라고 했잖아

여기 서 있으라 말했었잖아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물끄러미 선 채 해가 저물고 웅크리고 앉아 밤이 깊어도

결국 너는 나타나지 않잖아 거짓말 거짓말

그대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그대 말을 철석같이 믿었었는데

찬바람에 길은 얼어붙고 나도 새하얗게 얼어버렸네

애나 어머니의 장례식장. 애나와 함께 도망치기로 했던, 지금은 유부남이 된 그 남자 왕징과 훈이 한 테이블에서 만납니다. 애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시작된 둘의 미묘한 신경전은 주먹다짐으로까지 이어지죠. 대체 무슨 일이냐는 애나의 물음에 훈은 ‘저 사람이 내 포크를 허락도 없이 썼다는 어이없는 핑계를 댑니다. 신기한 건 애나의 반응이었어요. 애나는 왕징에게 남의 포크를 함부로 쓰면 어떡하냐며 소리를 지릅니다. 왜 이 사람 포크를 써요. 허락도 없이 남의 포크를 쓰면 어떡해요. 대체 왜 그랬어요! 왜왜! 소리를 지르다 오열하는 애나 앞에 왕징은 미안해.. 탄식 같은 한마디를 뱉습니다. 

어느새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애나와 훈은 돌아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합니다. 헤어짐을 앞두고 훈은 돌려받았던 시계를 애나에게 주려 하지만, 애나는 받지 않죠. 굿바이 짧은 인사를 남긴 채 버스에 올라탑니다. 처음 버스에 탔을 때만큼 표정이 없는 얼굴이지만, 자세히 보면 우는 얼굴, 삼키는 얼굴, 참는 얼굴, 겨우겨우 마음을 누르는 얼굴, 고마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얼굴입니다. 

버스가 출발하고 애나가 잠깐 잠에 들었을까요. 누군가 옆에 앉습니다. 헬로우 인사를 하고 어 미안해요. 내가 아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생긋 웃는 훈입니다. 


- 웃는 모습이 참 예쁘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난 훈이라고 해요. 

- 만나서 반가워요. 난 애나에요. 난 한국에서 왔어요 식당 하려고요. 난 휴가 중이에요. 중국으로 돌아가려고요. 거기서 헤어 살롱을 하거든요. 

- 오? 나 머리 좀 바꿔야 되는데. 

- 그렇네요. 바꿔야 할 것 같네요. 


꿈결같이 둘이 나른히 속삭이는 사이 버스는 속절없이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이 어떻게 됐는지, 훈은 어디로 갔는지는 그래서 그들은 행복해졌는지에 대해선 얘기하지 말기로 합시다. 다만, 2번의 가을이 더 지나고 애나가 석방됐을 때 그 곁에 훈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능글맞게 인사할 것 같은 훈을 떠올리며 애나는 미소 짓습니다.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오네요. ‘늦은 가을’이라는 노래입니다. 


탕웨이 '만추'


과거의 그림자가 내게 바짝 붙어 떠돌아요. 

내 눈앞의 세상은 무감각하게 평탄해요

실망하지 않지만, 기대하지 않을 순 없어요. 

사랑은 충분히 서로를 잊지 못하게 하죠

고독은 오직 나만의 몫이에요

고마워요 내 곁을 지나가 주어서 

낯선 당신은 익숙한 햇살같이

이 세상을 의미 없이 방황하는 나를 깨워주네요

알고 보니 나는 아직도 

당신을 허둥대며 보고 있어요

사랑은 제멋대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바람이 불면 물보라는 흩어질 수밖에 없어요

이렇지 않으면 또 어쩌겠어요

당신에게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지 묻지 않겠어요

 ‘영원’이 얼마나 짧을지 생각지 않을 거예요

다만 나는 당신이 내 곁에 머물길 바라요

사랑은 한 사람이 우긴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잘못이 있다면 당신과 내가 함께 메꾸어요

무언가를 기다리는 게 뭐 어때요 

늦가을이 끝나지 않은 들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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