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기가 내 삶의 터전이 되었으니까
한국에서 꿈처럼 달콤하기만 했던 두 달의 시간이 번개처럼 지나갔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채플힐로 돌아와 있더라고요. 내 나라 한국에서 얻은 에너지로 완벽하게 재충전할 수 있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3학기를 맞이했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마지막 논문 학기를 대비하고, 1학기때 눈물 콧물 쏟으며 드롭시킨 과목도 이수해야 했지만요. 18학점을 신청하면서도 버겁다거나 힘들다는 생각보다 기대감이 앞섰습니다.
"너 정말 괜찮아?"
같은 과 친구들이 저를 걱정해 주더군요.
"내가 여기에서 괜찮았던 적이 있었다고 생각해?“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는 이런 농담까지 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어요.
영어를 원어민처럼 하고 싶다는 간절함과 학점을 잘 받겠다는 목표지향적 생각을 내려놓으니 마음의 여유가 찾아왔어요. 하지만 그 크기만큼, 혹은 더 크게 재정적 압박이 다가왔습니다. 1년 넘게 벌어놓은 돈을 소비하는 삶을 사느라 재정적 상황이 더 열악해졌거든요. 룸메이트나 하우스메이트가 있다고 해서 해결될 외로움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렌트비는 절약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방 4개짜리 콘도를 쉐어할 수 있는 집을 계약했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에 살며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다는 하우스메이트 H를 알게 됐어요. H는 제가 힘들어할 때마다 한국 음식을 만들어 나눠줬습니다.
"고마워"
.... 근데 이거 내가 네게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니?
"쑤, 추석에 뭐 해? 학교 앞에 새로 생긴 비빔밥 가게에 가보지 않을래? 잡채도 판대!"
"와, 잡채라니! 정말 놀랍다! 어디에 그런 식당이 생겼어?"
.... 이곳에선 별다른 의미가 없어 잊고 지내던 추석인데, 네가 챙겨주다니! 고맙다 ㅠㅠ
같이 과제를 하고, 제 몫을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과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에는 부담스럽고 도망가고 싶었던 미국에서의 생활이 H와의 교류를 통해 점점 나아지고 있었어요.
때마침 성당 성서모임에서 만난 할머니의 소개로 교내에서 운영하는 독서모임의 코디네이터라는 일자리도 얻었어요. 큰돈을 버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삶의 활력이 되었답니다. 2주에 한 번씩 열리는 독서모임에 참석해 출석부를 작성하고, 모임 날짜와 시간, 장소를 공지하는 업무라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뜻깊은 기회였지요.
한국어를 배우고 있던 S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한국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 역시 즐거운 일 중 하나로 다가왔습니다.
점점 학교 수업은 겨우 따라가는 정도로 만족하며 교외 활동을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제 자신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미국에 머무르는 진짜 이유를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어 회피만 하고 있는 제 자신을 말이죠.
"석사 학위도 중요하지만, 친구들과 교류하며 미국의 문화를 더 잘 알아가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노력했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 제가 이곳에서 겪고 있는 좌절이나 절망 역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국이 아닌 곳에서는 단 1개월도 살아본 적 없는 제게 채플힐은 어느새 제2의 고향 같은 곳이 되어가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낯선 상황에서 수없이 무너져 내려도, 외로움을 마주하고, 또다시 무너져 내려도 채플힐이라는 도시는, UNC라는 학교는 제게 너무나 소중한 곳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로 인해 제게는 제2의 고향인 채플힐에서의 삶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요.
"이곳에서 새롭게 나의 뿌리를 내리는 것도 괜찮겠다"
저는 진심을 다해 채플힐을 제2의 고향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맞이하려면 고통이나 외로움, 절망과 같은 감정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중이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