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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방 Dec 27. 2018

9년 사귄 애인과 헤어졌다

주머니탐구생활#06. 차가운 손

“1년당 한 달씩이다.”

누군가 말했다. 1년 연애했으면 잊는 데 한 달이 걸리고, 2년이면 두 달, 그리고 나는 9년이니까 최소 아홉 달은 걸릴 거라고. “과학적으로 신빙성이 있어요?” 도통 어디서 나온 계산법인가 싶어 질문했지만, 당연히 논리도 풀이 과정도 없었다. 감정이란 게 그렇다. 주변의 우려와 달리 나는 울지 않았다. 단지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았다. ‘주머니가 꽤 넓구나.’    


애인과 사귈 때 자주 듣던 질문 중 하나는 “오래 사귀면 뭐가 좋아?” 하는 것이었다. “편해요”, “가족 같아요” 하고 생각나는 대로 답하다가, 어느 순간 확고한 대답이 생겼다. “손을 잘 잡아요.”


내가 손을 내밀면 애인은 손을 맞잡았다. 나를 주시하고 있지 않아도 늘 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내 코트 주머니에 맞잡은 손을 넣었다. 그 과정이 너무 익숙해서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귄 지 8년쯤 되던 해에 애인에게 질문했다. “왜 내가 손 내밀면 보지도 않고 잡아?” 애인은 자기도 몰랐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주 하는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대로 하지 않으면 불편함을 느낀다. 단순해 보이는 사실일수록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내 손이 만져진다.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애인과 헤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에도 열 번은 넘게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그날따라 주머니가 넓었다. 내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주먹을 꼭 쥐었다. ‘슬프다’, ‘눈물이 울컥 치밀어오른다’ 같은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보다 그 자리가 더 오래 남는다.

애인과 헤어지던 날 그는 나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말이 ‘나의 말’인지 ‘애인의 말’인지 확실하지 않다. 내가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한 말들일 수 있다. 반대로 그날 애인에게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도 그의 해석에 맡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해석의 여지가 커지고, 우리는 저마다의 오해만큼 부풀어 오르다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어디 박혀 있을지 모를 일이다. 멋대로 해석하지 않을 말들은 애인의 행동이다. 내가 몇 걸음 앞서가다가 뒤돌아봤을 때 애인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날 들었던 말들보다 그 한 번의 행동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 자리에 서 있던 애인의 모습과 조금 넓어진 주머니를 달고 하루하루 걸어간다.

주변의 우려와 달리 나는 울지 않는다. 단지 몰랐던 사실을 하나 곱씹는다.    


사람은 꽤 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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