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가을은 풍성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세계 최고의 한글을 가지고 있는 우리 언어이지만 오염이 심하여 문자의 수준을 따르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계절 이름만은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다행스럽다. 봄- 하면 따스함과 경쾌함이 느껴지고, 여름- 하면 ‘열매’와 결실이 보이는 듯하고, 겨울- 하면 ‘겨우’ 버틸 수 있을 만큼 추울 것 같다. 70년 전만 해도 우리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다. 가을- 이면 일 년의 ‘가장’자리에 들어선 셈이다. 이제 부르기 좋았던 2020년도 ‘갈’ 때가 온 것이다. 추워지기 전에 ‘갈’무리도 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글과 함께 절묘한 우리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이라고 하지만 가을의 매력은 그보다 훨씬 크다. 여인네들이야 봄이 제일 좋다지만 남자들이야 못생겨도 역시 추남(秋男)이다. ‘봄밤 한 자락은 천금’(春宵一刻値千金)이라지만 ‘가을 낮 날빛’은 만금(秋光一暉抵萬金)에 해당한다. 봄날은 기껏 연인들의 가슴이나 흔들어대지만 가을의 햇볕은 양식인 오곡을 영글게 하니 그 값이 같지 않다. 봄날은 사람을 나른하게 하지만 가을은 호방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불어 넣는다. 그런 어려운 말이 아니더라도 하늘은 추호(秋毫)가 보일만큼 깨끗하고, 산은 붉게 물들고, 계곡이 깊어지고, 물은 맑아지는 山川이야 일 년 중 가장 매력있는 자연의 모습이다. 살을 간지럽히는 가을 햇살과 뼈 속까지 시원하게 해 주는 바람이야말로 이 가을이 아니면 만날 수 없다. 그렇다고 가을이 늘 금년처럼 이런 것도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봄과 가을은 짧아지기 시작했다. 봄이 왔나 싶으면 이내 기나긴 여름이 오고, 가을이 왔다 싶으면 어느새 겨울이 치고 들어오는 것이 이 근래의 봄가을이다. 그런데 금년 가을은 일찍 왔다가 아직도 남아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더구나 시월의 마지막 밤에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라도 목메어 부르며 식어가는 가슴을 덥히고 싶다. 언제 다시 이런 가을을 또 만날 수 있을까?
특히 올해는 세계가 온통 코로나 때문에 난리라서 이 화창한 가을이 더욱 아쉬워진다. 듣자 하니 단풍구경도 맘대로 할 수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못 만나고, 동네 국밥도 맘 놓고 사 먹을 수 없는 세상이다. 하기야 코로나 덕택에 공기는 맑아지고, 교통사고도 줄어들고, 돈도 덜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가을에는 하늘은 덜 푸르러도, 교통사고는 좀 늘더라도, 씀씀이는 커지더라도 코로나가 빨리 갔으면 좋겠다. 노인네 몇 명이 죽는 게 문제가 아니라 경제가 멍들어 젊은이들이 좌절하는 것이 더 아프다. 이 험난한 세상에 유난히 청명한 가을이라서 더 안타깝다.
가을이 좋은 것은 수확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농경민족은 가을 한 철을 바라보고 산다. 유목민이야 뿌리지도, 가꾸지도 않고 초원을 찾아다니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모자라면 남들이 애써 생산해 놓은 재물과 식량을 뺏어가면 그만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자연과 계절과 상관없는 야만인이요, 도둑떼들인 셈이다. 계절과 자연의 섭리를 따라 하늘에 순종하며 사는 농경민들만이 가을의 참다운 가치를 알 수 있다. 그래서 가을은 농경민의 계절이라 할 만하다. 뿌린 대로 거두고, 힘써 일하고, 한 자리를 차지하고 같이 살 수 있는 것은 이 가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추석이나 추수감사절도 가을이 있기 때문에 생길 수 있었다. 정직하고, 근면하고, 착하면 복을 받고, 부모에 효도하고, 정착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가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정착문화가 그렇게 좋기만 한 것도 아니다. 한 군데 모여 산다면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동료와 경쟁을 벌여야 한다면 이웃이 반갑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정착문화는 다툼의 역사이다. 유목민들은 남과 다툼을 벌였지만 정착민들은 이웃과 다툼을 벌여야 했다. 경쟁을 벌여야 한다면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밀려나고 도태되어야 정착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 세계를 괴롭히는 코로나도, 구제역, 광우병도 모여 사는 정착문화의 산물이다. 거리두기를 하고 사는 유목민들이야 그런 것들은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코로나는 인간의 지나친 경쟁을 경계하고 징벌하는 하늘의 섭리일지도 모른다. 가을을 추상(秋霜)이라고 한 것도 서릿발 같은 계절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편안할수록 어려운 때를 생각하라는 말이 거안사위(居安思危)이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어찌 코로나뿐이겠는가? 풍성하고 상쾌한 이 가을을 마냥 즐기기에만 골몰할 수 없는 이유이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연인들이, 올해로 전세계약이 끝나고, 내년에도 취업준비에 허덕여야 하는 이 가을- 그래서 옛부터 시인들이 가을은 잔인하고, 슬픈 계절이라고 했다.
가을을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하늘은 한껏 높아지고, 말은 살이 찐다지만 지금은 말 대신에 여자들이 살이 찔 판이라 반갑기만 한 일이 아니다. 하기야 말이 살찐다는 말도 원래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옛날 중국 북방의 유목민들의 말이 살이 찌는 가을이면 먹을 양식이 떨어질 때라 노략질을 시작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하늘이 푸르른 가을이 오면 말 타고 쳐들어오는 오랑캐들의 침략을 대비해야 했다. 그러니 천고마비는 일종의 비상경계령이었다. 옛날 우리로 말하면 왜구가 쳐들어 올 시기 쯤 되는 셈이었다. 그래서 ‘강강수월래(羌羌水越來)-왜구가 물 건너 온다’라는 놀이가 생겼다는 말도 있다. 오랑캐라는 말도 원래 북방에서 살던 유목민 종족의 이름이었다. 그래서 왜구를 오랑캐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북한이 하는 짓을 보면 오랑캐와 다름이 없으니 딱한 일이다. 남으로는 왜구- 북으로는 오랑캐- 시도 때도 없는 코로나와 국론분열-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불황- 이 좋은 가을이 유달리 가슴을 저리게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가을만 같아라’ 노래 부르며 풍성한 수확으로 삶을 누리고, 조상과 하늘에 감사를 드렸던 이 가을에- 우리의 삶은 팍팍하고 고달프다. 더욱이 보기 드물게 상쾌한 이 가을을 팬더믹 코로나로 보내려니 서글퍼지는 것이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