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겸손의 노년

스스로 낮추면 높아진다.

by 김성수

낮추고 덜어내야 비로소 높이고 더할 수 있습니다.

이미 차고 넘친다면 더 이상 채우고 더할 수 없습니다. 그릇도, 사람도 차고 넘치면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없어지고, 여유가 없으면 위험하게 됩니다. 노년에 이르면 기력이 떨어지고, 젊었을 때보다 속이 더 좁아지기 십상입니다. 그릇마저 좁아졌으니 이제는 높이고 채울 필요도 없이 낮은 채로, 모자란 채로, 비워두고 여유를 즐겨가며 살 일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미덕입니다. 그것이 혹시 모를 경계와 질시를 피하는 길입니다.


노년에는 그렇게 어려운 겸허의 도까지 이를 것 없이 자신의 처지만 바로 알더라도 다행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노인은 원래 겸손하기 위해서 따로 노력할 필요조차 없을 것 같습니다. 사회에 구실할 수 있는 능력으로만 따져 말하면 노인은 이미 허물투성이의 퇴물에 해당합니다. 나이가 들면 뼈에 골수가 빠지듯이 총기와 기력도 빠져나가 버립니다. 짐승세계나 원시수렵사회에서는 늙은이는 집단에 남아있을 수조차 없는 퇴출대상이었으니 겸손이 아니라 한 몸 추스리기조차도 벅찬 처지입니다. 그나마 늙은이가 노인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인륜도덕이라는 인위적인 노력에다가 노인의 경험과 지혜와 부단한 노력이 더해진 결과였습니다. 옛날에는 평균수명이 짧아 70노인도 드물었던 시대였지만 지금은 백년장수가 많아 노인의 희소가치는커녕 노령화사회에서 젊은이의 희생을 강요하는 걸림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형편에 젊은이들을 탓할 겨를조차 없는 처지입니다. 노령화사회에서 옛날과 같은 인륜도덕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옛날 같았으면 벌써 죽었어야 할 나이에 염치없이 살아있다는 부담을 갖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합니다. 노인이 병이 많은 것이 아니라 죽을 목숨이 오래 살아서 병이 많은 것입니다. 지나친 자학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올바른 자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겸손은커녕 여전히 권위와 위엄을 내세우는 노인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경륜과 지식을 버리기 아까워하고, 때로는 자신을 터무니없이 과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보화시대에 구세대가 내세우는 권위, 위엄은 소통과 발전을 막는 장애물이 되었고, 경륜, 지식들은 대부분 쓸모없이 되어버렸습니다. 낡은 시대의 유물을 부여잡고서 스스로 세상을 지켜내는 보루인 줄 아는 노인은 먼저 그 자신이 새 시대의 걸림돌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구시대라고 해서 무조건 청산되어야 하고, 신세대라고 해서 항상 좋고 옳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노년이 보기에 신세대는 늘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대개 구세대의 지나친 노파심이기 마련입니다. 젊은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노인들의 잔소리입니다. 좋은 소리도 듣기 싫은 판에 싫은 소리, 시대에 맞지 않은 소리, 부당한 소리를 고분고분 들어줄 자식도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노인은 알량한 자존심, 긍지보다는 양보와 겸손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하고 이해하다 보면 자신의 부족함을 알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존중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아는 것이 지혜요, 모르는 것이 병이라고 했습니다.


익은 이삭은 고개를 숙인다고 했는데 사람은 익기도 어렵고, 고개를 숙여 겸손하기는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스스로 익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요, 교만입니다. 배우기는 싫어하고 가르치기 좋아하는 것이 노인의 병폐입니다. 익은 이삭은 곧 나락이 떨어지고, 만월은 곧 찌들어진다는 평범한 이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滿月만월에서 그칠 줄 모르는 것이 自滿자만이요, 自滿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自慢자만이요, 自慢에 스스로 속는 것이 自瞞자만입니다. 이 자만과 교만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사회의 천덕꾸러기를 면할 수 없게 됩니다. 겸손까지 이르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만 해도 큰 다행입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는데 노인들은 늘 잘난 것, 잘한 일만 생각하니 겸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내탓은 모르고 남탓에 바쁜 것입니다. 내탓을 알고,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겸손의 미덕입니다. 자신을 알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기에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보다 뛰어난 젊은이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만 해도 겸손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노인이 되어서도 노인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살 생각만 한다면 딱한 일입니다. 이 시대는 노년의 시대가 아니라 당연히 신세대의 시대여야 옳습니다. 노년은 신시대를 위한 밑거름이요, 씨앗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공자도 후생가외(後生可畏), 신세대를 경계하고 존중하라고 했습니다. 노년에는 신세대, 새 시대에 대한 불안과 걱정보다는 그들에게 설레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노인이 되면 자신의 본분과 처지를 깨닫고, 이제는 삶을 정리하고, 마음을 비우고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노년의 겸손미덕이 아닐까 합니다. 겸손할 줄 알면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편안해진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노년의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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