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노인의 행복

늙어질 때까지 산 것만으로도 이미 행복한 일이다.

by 김성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늙음을 탄식하고, 덧없는 세월을 원망하기 마련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노인의 행복이 적지 않습니다. 우선 요절, 병사, 횡사를 면하고 늙을 때까지 살아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입니다. 인생의 황혼이 서럽다고 하지만 삶의 마지막 길에 황혼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다면 오히려 축하할 일입니다. 요즈음은 고운 황혼보다는 미세먼지 비구름이 잔뜩 낀 서녘하늘이 훨씬 많습니다. 구태여 ‘인생은 苦海고해’라는 비관론을 빌지 않더라도 당장 먹고 살 걱정에 고통 받고 있는 요즈음의 젊은이를 생각하면 이제 죽을 일만 남은 것이 차라리 잘 된 일입니다. 젊은이처럼 살기가 어려운가, 늙은이가 죽기가 어려운가? 혹은 죽기가 어렵다고도 하지만 그것은 품위 있는 죽음을 말하는 역설일 뿐, 평범한 늙은이는 죽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세상에는 이꼴저꼴 안 보고 싶은 일이 그렇게 많아서 사람들은 ‘죽겠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그것은 늙음을 기다리지 못한 조급증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노년의 행복을 모르고 죽는다면 억울한 일입니다.
늙으면 사회에서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지만 이 사회에 책임질 일이 없다면 얼마나 자유로운가?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다하기에 노력했던 사람은 이제 그 의무에서 자유로워진 것이 홀가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장담하거나, 늙었다고 알아주지 않는다며 서운해 하는 것은 분수를 모르는 욕심입니다. 알고 보면 그런 사람일수록 사회에 기여한 공보다는 해를 끼쳐온 사람이기 쉽습니다. 늙어서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지만 헛된 욕심을 버리고 자유로운 노년을 즐길 수 있는 노인은 행복합니다.
늙어지면 사회활동이 좁아져 돈 쓸 일도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늙으면 돈 벌 일도 없어지지만 웬만한 연금만 있으면 돈 걱정도 줄어듭니다. 병 들어 약봉지나 부여잡고 버텨본들 괴로운 인생입니다. 노인병원, 요양원에 가 보면 죽느니만 못한 노인들이 처량하게 쌓여있습니다.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며 병들어 오래 사는 것은 차라리 저주요, 재앙입니다. 그런데도 병원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늙을수록 큰 병원 가까이 살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늙은이가 적지 않습니다. 연명치료로 臥病長壽(와병장수)하면 자식들은 진이 빠집니다. 사랑을 입에 달고 살다가 스스로 사랑을 원수로 만들며 죽는 것은 부모가 되어 같이 늙어버린 자식에게 차마 할 도리가 아닙니다. 이왕이면 살아서는 깔끔하고, 죽어서는 이 세상에 아름답고 떳떳한 미담을 남기고 싶습니다.
늙으면 먹거리를 걱정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 안심할 먹거리는 없는 듯합니다. 각종 환경오염, 농약, 항생제 오염, 유전자조작 식품, 유해 첨가물, 방사능오염 등에서 안전한 식품은 거의 없습니다. 젊은이에게 그런 식품은 심각한 위협이지만 늙은이들은 그런 것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식품의 위협은 장기간에 걸쳐 누적되었을 때 위해의 가능성을 말한 것이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에게 그런 것들은 전혀 걱정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유기농, 친환경식품이 아니면 어떤가? 미세먼지가 아무리 무섭다 해도 살 만큼 산 노인들에게 그런 것들은 시답잖은 호들갑일 뿐입니다. 이런 기회에 싼 값으로 먹는 즐거움을 누려도 좋을 것입니다. 그 즐거움이 구차한 생명에 애착을 갖는 근심 걱정보다 훨씬 클 것입니다.

노인이 되어 진정 후손들이 걱정되걸랑 ‘내 나이가 어때서’를 외치는 넉살보다는 ‘내 나이에 죽으면 어때서’라는 염치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못할망정 나의 행복을 위해서 자식들의 버거운 짐이 되어서야 파렴치한 늙은이가 아닐까? 무병장수를 외치면서 점잖게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죽는 것이 어디 마음대로 되나?’이지만 늙었어도 마음만 먹으면 가치 있게 죽는 길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다만 하루라도 더 살 욕심에 모른 척 할 뿐입니다.


‘有終유종의 美’라는 말도 있고,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노년만 잘 보내면 인생 전체가 성공작이 되는 것이니 그야말로 전화위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전의 쓰라린 실패도 행복으로 바꿀 수 있고, 화려했던 과거도 불행으로 끝날 수 있으니 인생역전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살인강도도 십자가 위에서 말 한 마디로 한 순간에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었습니다. 삶의 끝자락에서 평생의 禍(화)를 福(복)으로 바꿀 수 있는 패를 쥔 노인은 젊은이보다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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