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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Feb 04. 2021

우리말 漢字

한자는 외국어가 아니라 국어이다.


  우리말의 7할 이상이 한자어로 되어있거나 그에 어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단순논리로 말하면 한자를 모르면 우리말의 절반 이상을 제대로 모르고 쓴다는 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우리말의 7할을 가르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 표기만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고유어일 경우 한글로도 소통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한자어계의 어휘일 경우 한자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는 언어 소통의 깊이와 폭이 같을 수 없다. 인간을 人間이라고 소통하는 사람은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치를 더 깊이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도리를 道理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사람의 본분을 더 생각하게 마련이다. 자유를 自由로 소통하는 사람은 ‘내 마음대로’라는 개인주의로 흐르기 쉽다. 한자는 한글이 할 수 없는 특별한 언어능력이 있는 것이다. 

  한글은 배우기는 쉽지만 소통성은 떨어지고, 한자는 배우기는 어렵지만 소통성은 뛰어나다. 한자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편리만을 챙긴 게으름이다. 한글이 최고의 글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소통성이 떨어진다면 자랑만 할 일이 아닐 것이다. 값이 싸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닐 것이고, 값이 비싸다고 필요한 물건을 사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천 년을 이어 우리 문자수단이었던 한자를 외국어라고 내쫓는 것은 혈육을 버리는 짓이다. 한자를 모르고 쓰는 우리말은 지금도  불편하다. 만약 지금과 같이 漢字 없이 한자어만 쓰는 방식이 계속된다면 50년이 못 가서 문자불통의 시대가 될 것이다. 한자교육은 남의 나라 글자가 아니라 국어교육의 일환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한자가 좋아서, 주체의식이 허약해서 한자를 가르치자는 말이 절대 아니다. ‘한자교육’은 ‘한글사랑’과는 다른 말이지만 ‘국어사랑’과는 다른 말이 아니다. 한자가 불편하고 비능률적인 문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국어에서 한자의 비중이 크다는 엄연한 사실을 알면서도 단지 자주의식, 편리만을 내세워 한자교육을 포기한다든지 한글전용론을 내세우는 것은 눈앞의 편리를 위해서 더 중요한 문화전승과 소통력을 포기하는 것이다. 수천 년을 우리 국어에서 살아온 한자를 수십 년 만에 일시에 우리 국어에서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문화와 역사의 원리를 모르는 짓이다. 한자가 국어기능을 맡아 온 역사를 생각한다면 그것을 없애는 데에는 적어도 수백 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에는 한자어를 고유어로 대체하려는 부단한 의지가 없어서는 안 된다. 정상을 ‘우두머리’ 사상을 ‘생각’ 교육을 ‘가르침’으로 쓰려는 노력이 없으면 결국 한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우두머리’ ‘생각’ ‘가르침’으로 그 한자어를 대체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영어를 우리말로 옮긴다는 것이 대부분 한자어에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자 없이 표기하는 번역 한자어는 지금도 소통이 쉽지 않은데 얼마 안 가 또 다른 소통 장애가 될 것이 틀림없다. 나랏돈으로 운영되는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한다는 짓이 겨우 이런 문화단절 행위를 하고 있다. 힘이 들더라도 처음부터 한자어 대신에 고유어로 옮기는 것이 국어사랑의 길이다. 그러한 노력도, 능력도 없으면서 한글전용론을 고집하는 것은 문화파괴와 다름없다. 한자어를 고유어로 바꿀 자신이 없다면 한자를 국어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학자의 양식이요, 역사적 의무일 것이다. 

  한글의 우수성을 내세워 한자교육을 반대하는 것은 탱크가 있으니 소총은 필요 없다거나 불도저가 있으니 삽은 필요 없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한글이 우수한 글자이고, 한자가 불편한 글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단지 불편하다고 해서 필요한 것을 없앤다면 ‘노력’ ‘극복’이라는 가치가 필요 없게 된다. 역사 이래로 한자는 유일한 우리의 문자였고, 한글 창제 이후로도 한자는 줄곧 국어의 중심에 있었던 분명한 사실을 잊는다면 역사의 죄인을 면할 수 없다.   

  한자를 단지 배우기 어렵다고 해서 배척하는 것은 게으른 생각이다. 어렵다고 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문화는 발전할 수 없다. 실용, 적성, 흥미교육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을 오로지 하는 것은 균형적인 인간에 차질이 올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이지만 싫은 것도 할 수 있어야 사회의 행복도 지켜낼 수 있다. 그래서 교육은 좋아하는 것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도, 어려운 것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한자를 배우기 싫어한다고 해서, 배우기 어려운 글자라고 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은 교육의 본질을 모르는 짓이다. 불편하더라도, 억지로라도 바로 잡는 것이 교육이다.    한글 덕분에 우리는 세계적으로 문맹률이 낮은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실질문맹률은 세계적으로 높은 나라라고 한다. 실질문맹이란 글자는 읽어도 의미는 모르는 것을 말한다. 글을 읽고, 말은 해도 그 의미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독해력은 물론 규정, 규칙, 공고문, 안내문, 법조문, 약정서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공개담화, 강의는 물론 일상대화마저 소통되지 않는 일이 다반사이다. 쉬운 한글로 낮은 문맹률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실질문맹률이 높은 이유는 한자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읽어도 그 뜻을 제대로 모르고, 아는 것 같아도 제대로 모르는 실질문맹자들이 즐비한 것이다.   

  일상언어도 이렇다면 전문영역이나 학문연구에 이르면 그 심각함이 훨씬 더하다. 지금 우리 국문학계에서 가장 해독이 어려운 문헌은 어려운 한문이 아니라 개화기 언저리에 기록된 한글문서이다. 한자에 의존해 살다가 갑자기 한글로만 기록된 문헌은 발음기호와 다르지 않다. 문화유산을 암호로 적는다면 문화 전승이 아니라 문화단절 행위이다. 지금 우리가 한자 어휘를 당장 불편이 적다 하여 한글로만 적는다면 옛날 우리 선조가 지질렀던 문화 단절이나 파괴행위와 다를 바 없다. 한자어를 고유어로 바꾸려는 노력도 없이 한자교육의 단절을 계속한다면 불원간에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겪고 있는 문화단절을 더 심각하게 겪을 것이다. 문화파괴를 자행하면서 국어사랑 나라사랑을 부르짖는 것은 참으로 철없고, 염치없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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