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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Jun 20. 2024

제주도에서 26

면형의 집




  한라산 줄기를 남쪽으로 내려가면 서귀포가 있고, 서귀포 서홍동 올레길에 ‘면형의 집’이 있다. 얼핏 이름만 들어서는 분식집이나 빵집일지도 모르겠지만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피정의 집’이다. 면형(麵形)을 글자풀이하면 ‘밀떡’이지만 본래 의미는 성체(聖體), 즉 ‘그리스도의 몸’의 비유적 표현이다.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명하신 대로 밀떡을 그리스도의 몸, 성체로 규정하고 미사 때마다 성체기념 예절을 치르는데 그것이 미사의 핵심이다. 수도회에서는 1976년에 옛날의 성당 터에 피정의 집을 세우고 ‘면형의 집’으로 명명하였다.  원래 취지는 麪形無我(면형무아)라는데 줄여 말하면 ‘면형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는 뜻이라지만 불경, 선어(禪語)만큼이나 어려워 보인다. 면형의 집은 피정을 목적으로 지어졌다. 避靜도 역시 한자 이름인데 ‘시끄러운 세상을 떠나서 안정을 찾는다’는 천주교의 신심심화(信心深化) 활동이다. 얼핏 ‘고요함을 피한다’로 해석될 법해서 역시 쉬운 말이 아닐 것 같다.


  면형의 집은 약 9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과 교육시설을 갖추고 있어 연중 전국에서 피정 지원자들이 단체로 찾아온다. 나는 여기에 와서 행복해 하는 교우들을 부러워하고, 교우들은 여기 사는 나를 부러워하니 여기가 그만큼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도심지를 피해서 귤밭 돌담으로 둘려져 있는데 원래 이곳이 제주감귤의 시원지(始原地)라고 한다. 백여 년 전에 프랑스에서 온 다케 신부님이 주민의 소득증대를 위해서 일본에서 온주밀감을 14주 가져다 심었는데 이것이 지금 제주밀감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그 나무가 늙어 없어졌지만 그 자리에 제주감귤의 시원지를 안내하는 커다란 기념비가 있다. 다케 신부님은 귤 말고도 구상나무, 왕벚나무 등 수많은 제주의 식물을 채집하여 세계에 알리는 데에 힘썼다.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이곳을 '다케의 정원'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면형의 집의 랜드마크는 단연 거대한 녹나무이다. 제주에서는 많이 볼 수 있지만 여기에 있는 녹나무는 수령이 250년이 넘어서 제주에서 제일 오래된 녹나무로 보호수로 지정되어있다. 높이는 17미터, 나무둘레는 5미터에 이르는 거목이다. 나무를 타고 오른 기생덩쿨마저 나무와 어우러져 고색이 창연하다. 녹나무는 육지와는 달리 봄에 새잎이 난 다음에 묵은 잎이 떨어진다. 그래서 육지처럼 추풍낙엽(秋風落葉)이 아니라 춘풍낙엽(春風落葉)이고, 상록수와 다름 없다. 나중에 귤나무를 베어내고 지금과 같은 정원을 꾸몄는데 야자나무를 비롯한 각종 정원수가 조화를 이루고 있어 서귀포의 명소가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병솔나무인데 그 이름이 또한 절묘하다. 빨갛고 술이 가느다란 그 꽃을 처음 보고 병을 씻어내는 솔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신기하게도 그 이름이 원래 병솔꽃이었다. 국적불명의 이름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렇게 멋진 이름을 지은 사람이 고맙다. 제주도에는 소철이 참 많은데 여기의 소철도 일품이다. 소철에도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암수가 따로 있다는 것을 제주도에 와서 처음 알았다. 제주도에서는 아름다운 수국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여기의 수국도 빼놓을 수 없는 경관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에도 이름을 다 알 수 없는 야생화들이 비집고 자리를 차지해서 운치를 더하고 있다.


   피정의 집 정원에는 잘 가꾸어진 잔디밭 위에 각종 나무와 꽃, 풀, 그리고 황금비단잉어가 헤엄치는 연못도 있다. 왜가리라는 놈이 여기까지 와서 눈독을 들이기도 한다. 제주도에는 화산석이 많아서 물을 담을 수 있는 저수지나 못이 많지 않아서 흔치 않은 광경이다. 정원에는 예수님의 수난을 기념하는 14처상이 있는데 자연석과 조화를 이룬 그 성상(聖像)이 또한 뛰어나다.


  면형의 집에는 피정객들을 위해서 지은 아담한 성당이 있다. 작지만 다소곳한 건물 곳곳에는 나름의 의미가 숨어있어 범상치 않다. 성당은 이층 반지하로 되어있는데 이는 낮은 곳에서 겸손하라는 의미라고 한다. 제대(祭臺)는 한라산을 거꾸로 놓은 듯한 성작(聖爵)모양을 하고 있어 제주도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살려냈다. 벽면은 콘크리트가 알몸으로 노출되어 있어 거칠게 보이지만 검박한 수도원 정신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면형의 집은 수도원이라 아침미사 시간을 빼고는 절간보다 조용하여 그야말로 피정에 걸맞는 공간이다. 정원에는 여기저기에 흔들의자가 있는데 거기에 앉아서 그늘과 햇볕을 받고 있으면 좀처럼 일어나기 싫어진다. 다만 수사님이나 나보다 더 조용한 곳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방해가 될까 미안스러울 뿐이다.   


 면형의 집에는 다섯 분의 수사님이 있다. 본당사제와는 달리 수사님들은 수도가 목적이기 때문에 그 활동이 또한 매우 피정적이다. 피정과 성지순례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외부활동을 피하고 침묵을 지향한다. 면형의 집 성당에는 피정객 외에도 주변에 사는 교우들도 아침미사에 참례한다.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이 매일 다르기 때문에 본당보다 깊이있고, 참신하고, 다양하고, 지루하지 않은 강론을 들을 수 있어 좋다. 본당에서 있을 수 있는 갈등도 피할 수 있고, 나 같이 게으른 신앙생활도 가능하다. 나는 틀에 얽매인 피정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혼자서도 피정 할 수 있는 면형의 집이 좋아서 아예 문 앞에다 자리를 잡았더니 내 집도 또한 이승의 명당으로 부족함이 없다. 제주도에서 가장 제주스러운 곳은 서귀포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서귀포다운 곳 중의 하나가 면형의 집이 아닌가 한다. 풍수에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했는데 구태여 뒤로 솟아오른 백록담, 앞으로 아스라한 태평양이 아니더라도 면형의 집은 충분히 하늘과 자연과 어우러진 감실(龕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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