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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Sep 19. 2024

고맙습니다 4

고마운 書道

 한가한 시간이 많다 보니 소일거리가 더 필요해졌다. 컴퓨터나 책, TV, 유튜브, 산보- 이런 것들로도 ‘시간만 부자’의 무료함을 다 채울 수 없었다. 옛날에 취미서예를 한 가량이 있어 미련이 있었지만 至尊(지존)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 먹물로 집안이 지저분해진다는 이유였다. 아닌 게 아니라 서예를 하다 보면 먹물이 튀어 벽이나 방바닥을 버려놓기 십상이었다. 붓을 빠는 일도 보통 거역스러운 일이 아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미세한 비말로 튀는 먹물의 흔적을 지우기 어렵다. 더구나  솜씨가 남에게 내세울 수준이 못 되니 기껏 종량제 쓰레기만 만들 뿐이다. 사정이 이러니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5년 만에야 통사정하여 어렵사리 허락을 얻어냈다. 대신 正道에 어긋나지만 벼루 없이 먹물만 쓰고, 붓도 단봉소필(短鋒小筆)만을 사용하기로 했다. 벼루에 먹을 갈면 먹물이 튀기 쉽고, 붓이 길고 굵으면 먹물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뒤처리를 완벽히 해야 하고, 만약 벽지를 더럽히면 도배를 책임지기로 했다. 

 

 그래봐야 내 서예 솜씨는 下手중의 하수다. 그래도 매일 한 시간 이상 끄적거리다 보면 알량한 옛날 솜씨가 조금은 나오는 것 같아서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붓만 잡으면 그때마다 분심이 생겨 정신이 글씨에 모아지지 않는 것이었다. 전에 없던 이상한 현상이다. 서예의 장점은 정신일도(情神一到)라는데 나에게는 분심만도(紛心萬到)였다. 그것도 신기하게 옛날 내가 잘못했던 일만 또렷이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일들이라 마치 잠재의식이 살아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추억이라면 좋겠으나 하나같이 마음이 저리도록 후회스러운 일들이었다. 붓을 잡고 정신을 모아 보지만 어느새 붓 놀리는 일은 건성이 되기 일쑤였다. 아무리 정신을 가다듬어도 가슴 저린 일들이 되살아나서 머리를 어지럽힌다. 이러다 보니 글씨도 엉망이고, 소일거리가 아니라 고통의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니 지워져 있던 죄의 기억을 재생시킨다는 것은 무뎌진 양심을 깨닫게 해 주는 하느님의 섭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본래 직선적이고, 화를 잘 참지 못하고, 술에 취하면 일 년에 한두 번쯤은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생각이 깊지 못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고, 지혜롭지 못한 처신으로 주위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남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다 보니 어린 학생들에게 권위적인 언행으로 상처를 많이 주었다. 남을 아프게 하고, 용서도 받지 못하고, 그걸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면 정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나의 죄는 잊어버리고, 내 잘한 것만을 기억한다면 이기적인 인간이다. 이런 사람이 많기 때문에 세상에는 고마워할 줄 모르고, 남 원망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남을 원망하다 보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여유가 없을 것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만이 많고, 불만이 쌓이다 보면 스스로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남을 배려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런 사람이 많아서 오늘날처럼 이기주의, 개인주의가 정당화되기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래도 남보다는 덜 악하고, 덜 죄를 짓고, 더 합리적이고, 더 인간적일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사는 것도 내 잘못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로 인하여 손해와 상처를 입은 사람이 사죄도 없이 어떻게 나를 용서할 것인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큰소리 치는 사람도 있지만 당사자의 용서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하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자신도 모르고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죄의식마저도 없었으니 나는 그들에게 용서받지 못한 죄인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제까지 먹고 살 걱정 없이 두 발 딛고 살아있으니 어찌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룬 모든 성과는 나의 능력과 노력의 당연한 결과였다고 생각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는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혹시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살다 보면 그런 시련쯤은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인생사라고 위안삼는 데 그쳤다. 교만과 어리석음이 도를 넘었으니 싸이코패스들을 미워할 자격이 있을까 싶다. 


  서예는 이런 깨달음을 주었다. 처음에는 이 나이에 글씨 솜씨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회의도 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것과 상관없이 참으로 값진 시간이다. '망각의 미덕'을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글씨를 쓰면서 과거의 죄과를 찾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가? 그것은 정신일도(情神一到)하여 서예의 수단을 높이는 것보다도 더 가치로운 일이 될 것이다. 이래서 서예를 ‘마음의 수양’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만 나에게는 마음의 안정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혼란이 더 크게 일어나는 ‘분심의 수양’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솜씨를 내세우는 서예(書藝)보다는 정신수양인 서도(書道)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비록 아내의 인내를 요구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잘못을 깨우치고, 매사에 고마워하는 마음을 심어줄 수 있다면 글씨의 수준을 떠나서 서도는 충분히 가치가 있는 소일거리라는 것이 요즈음 내가 새로 깨달은 사실이다. 진즉 이를 깨달았더라면 후회도 적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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