養生(양생)의 이치
이사 한 지 얼마 안 되어 아파트 정원수들이 갑자기 전기톱에 뭉텅뭉텅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냥 가지치기 정도가 아니라 거의 기둥만 남기는 벌목에 가까웠다. 이 아파트로 이사 올 때 매력 중의 하나가 울창한 정원수였는데 그런 나무가 하루아침에 무참히 잘려나가니 속이 상했다. 이런 일에 잘 나서지 않는 성미였지만 관리소에 항의했더니 태연하게 대답하기를 여기서는 몇 년에 한 번씩 이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하기는 주민들도 아무도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집 앞의 나뭇가지를 더 쳐달라고까지 하였다. 이러니 흥분해서 항의했던 내가 오히려 별난 주민이 되었다. 참 인정머리 없고 나무 귀한 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사태가 이렇게 되니 새로 이사 온 외지인으로서는 꿀 먹은 벙어리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보니 우리 아파트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나무를 잘라내면 주변경관이 오랫동안 흉측한 꼴을 벗어나기 어려울 건데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파트만 그런 게 아니라 개인주택에 있는 거목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좋은 나무를 사정없이 잘라내니 참 인정머리도 없는 사람들이다. 경관조성이나 도로개설로 마구 나무를 잘라내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백 년을 내다보고 사람을 가르치고, 십 년을 대비하여 나무를 심으라고 했으니 사람 다음으로 중한 것이 나무가 아닌가? 나는 나무를 잘라내는 것은 물론 숲을 가꾼다는 간벌에도 찬동하고 싶지 않다. 그냥 자연상태로 놓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내 생각이 짧았다는 사실을 아는 데에는 1년이면 충분했다. 일 년이 지나고 나니 잘려나간 나무에서 새 가지가 나고, 새 잎이 돋아서 나무의 모습을 다시 찾아가는 빠른 복원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제주도의 기후환경이 육지와는 달리 식물성장에 특별히 좋은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2모작 농사가 흔하고, 길가의 넝쿨식물도, 잡초도 성장속도가 매우 빨랐고, 정원이나 밭의 잡초도 무섭게 자라났다. 그러니 주변의 귤밭과 잔디밭에서 요란한 예초기 소음이 그치질 않는다. 제초제까지 뿌려대는 것도 못마땅했지만 그렇게 잡초가 성하니 일일이 뽑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나무를 잘라내는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예초기 굉음에 짜증을 내거나 제초제를 뿌려대는 일을 못마땅해하는 심사는 아무래도 이기적인 생각인 것 같다. 정원의 나무가 무성하여 창문을 가리고, 커다란 나무가 햇빛을 가리고, 잡초가 농작물을 해치는 일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내 기분만 중요했으니 얼마나 이기적인가? 내 이익과 감정만 생각하지 말고 더 많은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야 옳다.
생각하면 나무도, 농작물도, 잡초도 왕성한 생명력을 가지고 생기를 베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도 짐승도 먹거리가 생겨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생기가 부족한 한대지방에서는 나무도, 작물도, 잡초도 빨리 자라지 못한다. 생기가 왕성한 곳에서는 농작물도 다모작이 가능하지만 생기가 부족한 곳에서는 농사짓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동물들은 먹을 것이 충분하지 못하여 서로 살벌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열대지방에서는 나무 생장도 빠르고, 티크나 홍목처럼 더 단단하다. 그러나 한대지방에서는 나무도 성장이 느리고, 재질도 단단하지 못하다. 생기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생기가 모자라니 사람도, 동물도 살기 어려워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온대에 태어난 일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生자는 나무가 왕성하게 자라나는 모양을 그린 상형자이다. 식물의 성장이 왕성하다는 것은 생기가 넘쳐나는 것이다. 식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활기가 있으면 생기가 돈다고 한다. 그 활기를 남에게도 돌리면 생기를 나눌 수 있다. 진정한 생기는 자신만 생기를 누릴 것이 아니라 식물처럼 주변에 생기를 돌릴 수 있어야 한다. 헌혈처럼- 그것이 생기를 기르는 養生(양생)일 것이다. 돈도 쌓아놓고 있으면 생기가 없어 경제유통이 되지 않는다. 대화를 하지 않으면 소통이 되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선진경제국에서는 소비가 미덕일 수 있고, 소비가 막히면 나라돈을 풀어 유통시키는 정책을 편다. 정부에서 전 국민에게 현금지급을 하고 지역화폐를 장려하는 것도 그러한 수단의 일환으로 생각한다. 자식은 굶고있는데 살림걱정 하느라고 돈줄을 쥐고있으면 부모라고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몫이 줄어들 것 같아 굶는 형제를 도와주는 부모를 편애한다고 불평한다면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만 살겠다면 생기가 없는 사람이고, 남을 해치는 사람은 남의 생기마저 빼앗겠다는 사람이다. 이는 생기가 아니라 殺氣(살기)이다. 식물은 생기로서 세상을 살려내는데 사람은 자신의 생기를 위해서 다른 생물의 생기를 빼앗는 일을 당연한 일로 안다. 나무 잘라내는 일을 못마땅해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의 생기를 잘라내는 일이 없는지 살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자신은 물론 남의 생기까지 기를 수 있는 양생(養生)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의지도 없이 오래 살려고만 애쓴다면 살아있어도 생기 없는 노인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