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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철 Apr 28. 2019

황거, 역사 속으로 뛰어든 조선인들

도쿄, 2018년 11월

여섯번째 이야기

도쿄도 치요다구 치요다





에도를 춤추게 한 조선통신사


 도쿄의 풍물을 노래한 20세기 전반의 유행가, 도쿄부시(東京節)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된다.


도쿄의 중추는 마루노우치
히비야 공원, 양의원(국회의사당)
세련된 구조의 제국극장에 
위엄 있는 저택은 경시청
여러 관청이 늘어선 바바사키몬
해상빌딩, 도쿄역
칙칙폭폭 떠나는 기차는 어디를 가나





 츠키지 구경을 마치고 황거(皇居, 고쿄)를 구경하기 위해 바바사키몬(馬場先門)에서 내렸다. 한편에는 마루노우치의 스카이라인이, 다른 한편에는 도심에서 보기 드문 녹음이 펼쳐져 있었다. 도쿄부시의 노랫말에도 나오듯 이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도쿄의 중심이었다.




바바사키몬에서 바라본 일본 최초의 서양식 연극극장, 제국극장(사진 좌측). 
옛 해자에 현대의 고층빌딩이 발을 담그고 있다. 제국극장은 1911년 지어졌는데, ‘오늘은 제국극장, 내일은 미츠코시'라는 당시의 선전문구처럼 근대의 소비문화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지금의 현대식 빌딩은 1966년에 지어진 것이다. 


미츠코시 백화점의 팸플릿 광고들(1913~1928). 
‘오늘은 제극, 내일은 미츠코시'라는 선전문구를 사용하였다.



 지금은 옛 바바사키몬 자리에 왕복 8차선 도로가 놓여 수많은 차들이 해자를 건너고 있지만, 원래 바바사키몬은 해자에 다리도 놓여있지 않아, ‘열리지 않는 문(不開御門)’이라 불리는 에도성의 작은 성문이었다. 배를 이용하지 않으면 문으로 기능할 수도 없는 이 작은 문에 바바사키몬이라는 이름이 붙은 까닭은 의외로 조선과 관계가 있다.


 1635년 그러니까 조선 인조 14년,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3대 쇼군으로 취임하자 조선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에도성에 들어온 조선통신사 일행은 이 바바사키몬 안쪽에 있던 마장(馬場, 바바)에서 일종의 쇼군 즉위 축하공연으로 곡마술을 공연했다. 그 뒤로 에도사람들은 이 마장을 ‘조선마장’이라 부르기 시작하였고, 조선마장 앞에 놓인 이 문을 ‘마장 앞 문’이라 하여 바바사키몬이라 부르게 된 것이었다.


 비록 작은 문에 지나지 않지만 쇼군이 사는 성의 성문 이름이 조선통신사에서 비롯되었다니, 조선통신사의 에도 방문이 얼마나 성대한 이벤트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조선의 의도와 달리, 에도 막부는 조선통신사 접대를 대대적인 국가 행사로 치름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이용하였다. 조선통신사의 방문은 ‘에도 막부야말로 외국이 인정하는 일본열도 제일의 권력’임을 대내적으로 선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인조14년, 통신사가 에도성에 입성하는 행렬을 묘사한 ‘통신사입강호성도(通信使入江戶城圖)’의 일부. 
우측의 마상재(馬上才)가 바로 곡마를 의미한다.
(사진출처 : museum.go.kr)


조선통신사 마상재의 곡마를 묘사한 일본의 ‘조선통신사마상재도권(朝鮮通信使馬上才図巻)’ 중 일부.
(사진출처 : enchiren.com)



"최후의 일인이 최후의 일각까지", 혁명가 김지섭


 바바사키몬으로 들어서면 다소 휑한 인상의 황거 앞 광장이 나온다. 인터넷 등으로 미리 참관신청을 하지 않은 여행자가 들어서는 것이 허락되는 곳은 여기까지이다. 이곳에서는 황거의 정문과 옛 에도성의 성채인 후시미야구라(伏見櫓)를 볼 수 있다.


 에도성이 처음 지어진 것은 1457년으로, 159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성을 거점으로 삼으면서 이곳은 막부의 중심이 되었다. 메이지유신 이후인 1869년에는 교토에 있던 덴노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에도성은 황거라 불리게 되었다.



황거 앞 광장의 소나무들.  쓸쓸한 간격.


황거 앞 광장에서 바라본 마루노우치. 기중기의 몸짓. 


황거 정문(사진 좌측)과 후시미야구라. 후시미야구라는 성 내부의 성채로, 수장고이면서 동시에 방어기능을 겸하게 설계되었다.



 위 사진에 보이는 해자에 걸린 두 개의 다리는 덴노가 국회개회식이나 국빈 방문과 같은 특별한 행사에만 이용하는 다리로 ‘이중교(二重橋)’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정식 명칭은 앞쪽이 ‘정문석교’, 뒷쪽이 ‘정문철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뒤쪽의 정문철교가 목조이던 시절에 이층구조였다 하여 이중교라 불리던 것이지만, 일상적으로는 두 다리를 모두 통틀어 이중교라고들 부르는 모양이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24년, 독립운동가 김지섭의 이중교 투탄 의거도 뒤쪽의 철교가 아닌 앞쪽의 석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김지섭은 의열단원으로, 영화 밀정의 모델이 된 ‘황옥 경부 폭탄사건’의 핵심인물이기도 했다. 1923년, 김지섭은 경기도경찰부 경부 황옥의 중계로 경성에 다량의 폭탄을 반입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거사 전에 발각되어 상해로 도주하였다. 때마침 일본에서의 조선인 학살 소식을 듣고 분개한 김지섭은 제국주의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로 향했다. 후일의 공판에서 김지섭 본인이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그의 거사는 조선에서 벌어지는 폭정을 일본인들은 알지 못하니 정치가들을 반성케 하고 각성한 일본 노동자계급과 연대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김지섭은 상선의 일본인 선원들에게 폭탄과 권총이 든 꾸러미를 들어 보이며, 이 안에 아편이 들었으니 밀수를 도와주면 큰 사례를 하겠다 속여 도일에 성공했다. 당초에 김지섭은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져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비롯한 고관들을 없앨 계획이었으나 의회가 휴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목표를 황거로 바꾸었다.





 1924년 1월 5일 오후 7시. 구경꾼처럼 꾸며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던 김지섭은 이중교로 다가갔다. 이를 수상히 여긴 순사가 다가가 누구냐 묻자 김지섭은 순사에게 폭탄을 던졌다. 석교 한 가운데 떨어진 폭탄은 딱하고 뇌관이 발화하는 소리를 냈으나 폭발하지 않았다. 순사를 떠밀고 다리 위로 뛰어드는 그에게 위병들이 총을 겨누자 그는 위병들을 향해 폭탄을 던졌는데 정문 석책 위에 떨어져 폭발하지 않았다. 순사와 위병들이 달려들어 김지섭을 붙잡자 그는 다시 세 번째 폭탄을 던졌는데 그 또한 총성 같은 소리를 냈지만 폭발하지 않았다. 폭탄의 불발로 뜻을 이루지 못한 김지섭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28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밤을 준비하는 마루노우치



동화와 차별 사이에서, 이봉창




 황거 구경을 마치고 나설 때에는 남쪽의 사쿠라다몬(桜田門) 쪽으로 향했다. 지금의 사쿠라다몬은 1663년에 지어진 것으로 ‘마스가타(枡形)’라는 이중구조로 되어있다. 마스가타란 이중으로 성문을 두고 그 사이의 네모난 공간으로 적을 끌어들여 공격하는 일본 성문 특유의 구조를 말한다.



사쿠라다몬의 안쪽 문인 와타리야구라몬(渡櫓門). 황거 앞 광장은 도쿄시민들의 조깅코스다.


와타리야구라몬. 바깥문을 뚫고 이 공터에 들어온 침입자는 삼면에서 공격을 받게 된다.


사쿠라다몬의 바깥문인 코우라이몬(高麗門). 독특한 지붕구조가 특징이다.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고려문인데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부터 건축되기 시작한 성문 양식이라고 한다. 조선 건축양식과의 영향관계는 불명.


황거 밖에서 바라본 사쿠라다몬



 사쿠라다몬을 나서면 1895년 지어진 옛 법무성 본관과 현대적인 경시청 본부 건물이 보인다. 경시청과 사쿠라다몬 사이의 거리, 바로 이곳에서 이봉창의 의거가 있었다.





 일본제국이 벌인 동화정책의 산물이라 해야 할까. 이봉창은 오사카 등지에서 직공으로 일하던 그는 언어뿐만이 아니라 사소한 생활습관 하나까지 일본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일본제국의 신민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일본인 되기’, 그것은 한편으로 일상에서 조선인으로서 겪는 차별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노력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그의 마음에 불을 질러놓은 것은 1928년의 체포였다. ‘신일본인’으로서 쇼와 덴노의 즉위식을 보기 위해 달려갔던 이봉창은 한글 편지를 갖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일주일 넘게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조사를 받아야했다. 그동안 축적되어왔던 차별의 기억들이 그의 의식 저편에서 전면으로 단번에 쏟아져 나왔다. 이봉창은 명확히 깨달았다. 조선인을 동원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시동인(一視同仁, 어진 이―덴노가 누구나 평등하게 사랑함.)’이니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이 한 몸과 같음)’이니 하는 소리를 주워섬기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을 거부하고 이등시민으로 남겨두려는, 나아가 조선인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칭하며 위험시하는 일본제국의 모순적 태도를.



사쿠라다몬 앞 거리. 사진 중앙의 붉은 벽돌 건물이 ‘구 법무성 본관’이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좌측에 경시청 본부가 있다.



 1931년, 상해임시정부로 향한 이봉창은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그리고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0분경, 그는 바로 이곳 사쿠라다몬 앞에서 육군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쇼와 덴노의 마차를 기다렸다. 그러나 사쿠라다몬을 향해 다가오는 마차는 여러 대였다. 어떤 마차에 쇼와 덴노가 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던 이봉창은 두 번째 마차에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쇼와 덴노는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고, 수류탄의 화력이 미미했던 탓에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못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그는 그해 10월 10일 오전 9시, 이치가야 형무소의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봉창의 생을 생각하며 사쿠라다몬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시청이 코앞이니, 침략자의 총칼이 번뜩이는 이 거리에서 그는 어떤 마음으로 서있었을까.


 김지섭 그리고 이봉창. 역사라는 이름의 캄캄한 심연 속으로 뛰어드는 그들의 뒷모습, 휘날리는 오버코트 자락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듯했다. 조선과 일본은 고대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함께 뒤엉켜 살아왔기에, 여행자는 일본의 거리에서도 자신이 딛고 서있는 조선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미래의 우리들은 또 어떻게 얽히게 되는 것일까.



사쿠라다몬에서 바라본 국회의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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