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1학년이었던 내가 전학을 가는 날, 선생님은 앞에 나가서 인사를 시켰다.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온 나는, 엄마에게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씩씩거리며 말했단다.
'엄마, '김나나' 이 지지배는 울지도 않더라.'
어린 나이에 처음 '전학'을 겪으며 친구들 간 '정' 때문에 작별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친해진지 얼마나 됐을까. 또 다시 전학을 가게 되어 '애매한 친구들'만 남아버렸지만 새로이 친구를 사귀고 적응하며 여전히 웃고 떠들며 즐겁게 보낸 유년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직은 다르다. 학교에서는 지식을 배우며 벗을 만나고 회사에서는 일을 하고 돈을 받으며 '박대리, 이과장, 김부장'을 만난다.
아슬아슬한 경력직의 날들
경력직의 삶은 보드 위에서 파도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모습과 닮았다. '회사'라는 커다란 배가 있고 배 뒤꽁무니에 밧줄이 매달려있다. 서핑보드 위에 두 발을 놓고 밧줄을 의지한 채 배와 함께 앞으로 간다.
선박의 앞을 볼 수 없기에 어디로향하는지 알지 못한 채 때로는 잔잔한 물살을 타고 때로는 비바람을 만난다. 그러다 번개를 동반한 태풍을 만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려 물을 먹기 일쑤다. 최악의 상황은 번개를 직빵으로 맞는 것.
'불안'과 '편안'을 오가다.
행여 회사가 많이 어려워지면 1순위로 팽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불안(고용법 상 어려운 일이겠지만), 인사평가에 납득하기 어려운 불이익, 남들이 꺼려하는 소위 '구린 프로젝트'에 팔려가진 않을까 하는 염려가 불쑥 찾아온다.
반대로, 있는지 없는지 티도 안나는 One of Them이니 중간만 가면 되지 아닐까하고 숨을 곳을 찾으며 느끼는 편안함, 전 직장에서 엉켜있던 관계와 평가가 리셋되는데서 오는 편안함도 있다.
친해지고 싶어서
이직을 하고 진득이 회사를 2년째 다니며 불안감은 조금 걷혀갔다. 그들만의 리그라는 생각에 때로는 뒷걸음질 치기도 했고 철판 깔고 들이대기도 했다. 친해지고 싶어서. 괴로운 날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회사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드라마 허쉬에 디지털 매일한국의 캡 역할을 하는 유선 배우의 대사가 가슴팍에 퍽 하고 다가왔다.
하루종일 여기저기 지랄이 참 풍년인데 이빨이나 적시러 가자.
드라마 <허쉬> 극 중에 부서간에 복잡하게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상황에서 동료와 후배들에게 술 한잔 하러 가자는 대목이었다.
이직러인 나, 지금 내게 저런 말을 건넬 수 있는 동료가 없다.
외롭다면서도 속으로는 '돈으로 엮인 사이'라 생각하며 늘 경계를 놓지 않는다. 일을 하며 상처 받거나 상처 줄 때 머릿속에서 되뇐다.
돈으로 엮인 사이라고. 그러니 아무렴 어떻겠냐고. 회사에서 꾹 참고 퇴근하고 집에 가서 소고기 먹으면 된다고. 아무렴, 이빨 적시러 같이 갈 회사동료 없으면 뭐 어떻냐고.
나를 토닥인다.
그래도 벌어야 하니까,
이직러가 황량한 바다 한가운데서 순항하기 위한 방도는 2가지다.
배에 폴짝 올라타거나,나만의 잠수함을 만들어 바닷속으로 들어가거나.
첫째, 배에 폴짝 올라타기.
그들이 타고 가는 배에 올라타기 위해서 2가지 방법이 있다.
1. 죽을힘을 다해 밧줄을 잡아당겨 악착같이 올라타기
2. 배에 타 있는 사람과 친해져 손 붙들려 올라타기. (그야말로 소프트 랜딩)
너무 비굴한가. 서글프지만 사실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만약 위험 상황이 발생해 구조하러온 헬기가 있다면 배에 밧줄 매달리고 따라오는 자를 먼저 헬기에 태워 줄까. 아니면 배에 타고 있는 자를 태워 줄까.
굴러들어 온 돌이 이미 만들어진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끼어들기란 쉽지 않다. 개똥철학을 담은 맺기 어려운 이 글을 쓰다 보니 울적하다.
하지만 견뎌야 하는 현실이다.
둘째, 비상용 잠수함 만들기
한마디로 부캐다. 취업규칙에 부캐 금지 조항이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밧줄에 의지해서 갈 텐가. 비상용 잠수함이 있다면 물에 빠져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어쩌면 더 빨리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N잡하는 허대리는 그의 책 <N잡하는 허대리의 월급 독립 스쿨>에서 이와 같이 이야기한다.
내 인생의 운전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안된다.
마음에 큰 울림을 준 한 문장 이었다.내 인생의 운전대를 내가 잡듯이 밧줄을 놓치고 바다에 풍덩 빠지더라도 나만의 잠수함에 쏙 들어가 그 배보다 더 빨리 나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잠수함만 있겠는가, 비행기면 또 어떨까. 짠내나는 바다를 떠나 아예 공중으로 날아가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박나래의 '조지나', 김신영의 '둘째이모 김다비' 그리고 신인상을 탄 '유산슬' 까지 부캐 열풍이다. 본업의 페르소나를 벗고 덕질을 하는 제 2의 나, 즉 부캐를 만들어 SNS를 통해 알릴 때 때로는 낯간지러웠다. 혹여 회사사람이 나인 줄 알아 채고 비웃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숨어있는 사람들의 시선 보다 믿음직하게 내가 쌓아올린 기록이라는 친구를 더 믿고 부캐로 성장하기를 주저 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