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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전 술맛 이직 후 밥맛

by 아코더




퇴사의 맛


이미 일은 손에서 멀어졌기에 업무시간에 하는 일이라고는 친했던 팀 동료들 선후배들과 커피 마시며 수다하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들었던 질문은

"야, 너 그래서 뭐할 거냐 이제?"

였는데, 동종업계로의 이직인지라 조심스러웠기에 떠나는 순간까지 숨겨야 했다.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할까? 부모님이 딸기농사를 하시는데 그걸 이어받는다고 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구체적인데. 세부 질문이 들어오면 어쩌지?' 하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쉴 거다."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민을 가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 바닥이 좁고 아주 곧 알게 될 테니 괜히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는 것 보다 이정도로 둘러대는게 낫겠다는 판단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얘기 안 하길 잘했다. 뭐 나중에는 다 알게될 일이었으니...

친한 선후배, 동료들에게조차도 이직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이유는 3가지 정도로 들어볼 수 있겠다.


첫째, 그때 내가 사실대로 이야기 하면 꺼내야 하는 히스토리 들이 너무 많았다.

둘째, 이직이라는 불안정한 상황이 감당하기엔 복잡했다. 셋째, 퇴사 때만 느낄 수 있는 '세이 굿바이'의 무드를 깨고 싶지 않아서...


퇴사일이 임박했을 무렵에는 회사 선배 기수인 언니들과 점심을 먹으며 병맥주도 시켜서 노나 마셨다.

크~! 그 맛은 정말이지 기가 맥혔다. 한편으로 고마웠다. 회자정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떠나는 사람은 그저 떠나는 사람일 뿐인데, 그럼에도 같이 먹고 마셔주는 팀 동료들에게 감사했다.


한 번은 몇몇이 모여 곤드레만드레 술 마시며 울기도 했다. 이직을 하며 느낀 것은 '남는 건 사람이다'라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팀장놈 까기와 회사 뒷담화를 시부리던 '찐 우정의 사람들' 만 남는다. 7년 반이라는 세월은 초등학교 6년 (글쓴이는 국민학교와 초등학교를 과도기에 있던 세대임)을 넘어선 기간이고 대학 4년도 넘는 기간이다. 그 긴 세월 동안 한 공간에서 생활하며 복작 대던 기간이 짧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길었나 보다.

아마도 전 직장 출근 마지막 날이었을까. '감사의 글'이라는 제목의 메일을 팀원들에게 보내고 나서 눈물이 왈칵 나길래 화장실로 가서 숨었다.




이직의 맛


현 직장으로 이직을 하고 얼마 후, 학부 시절 존경하던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는데, 교수님 답변 메일을 발췌해 오면 이러하다.




From: W**KUL LEE
Sent: Tuesday, *** 12, 2020 11:29 AM
To: 킴숭
Subject: Re: 인사 (08학번 김**)


***은 내가 근무했던 곳이라 더더욱 애착이 가는 회산데, 네가 입사를 했다니 많이 기쁘다. 당연히 열심히 근무하리라 생각되지만, 선생으로서 더 열심히 해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인생은 35세 전후까지는 실력으로 인정을 받고, 그 이후부터 50세 전후까지는 인맥이 중요하고, 그 이후는 운이 좌우한다는 얘기가 있다. 모든 경우, 선행과정을 충분히 만족한 사람에 해당되는 것이겠지? 회사생활은 열심히 근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인관계도 정말 중요하다. 새로운 회사에서 사람들과 잘 화합하고 협력하는 관계를 많이 쌓기 바란다.





경력직 여성의 혼밥라이프

교수님께 죄송하게도 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혼밥러' 경력직 신세가 되었다. 전 직장에서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로는 둘째가 라면 서러웠던 나였다.


아! 점심시간 진짜 순삭이야!


할 정도로 업무시간에는 파김치 같다가도 점심시간에는 갑자기 없었던 에너지가 샘솟아 사람들과 낄낄거리던 나였건만, 아무래도 새로운 환경에 나를 내던지는 것이 쉽지가 않았나 보다.

이직 후 입사 초반, 팀원들 틈에 껴서 밥을 같이 먹으러 가자고 끼려고 하면 팀원들이 홍해를 가르듯이 좌우 여기저기로 무리지어 밥을 먹으러 흩어져 갔고, 근무지 근처 지리가 익숙치 않아 식당을 찾아 여기저기 헤맸다. 전 직장에 있을 때 점심시간이면 삼삼오오 무리 지어 점심을 먹고, 식후 커피를 마시러 다니던 내가 이제는 점심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혼자 외로이 점심 먹을 곳을 찾아 나서야 했기에 홀로 식당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경력직 직장여성이 되었다.



저, 이직이 처음이라,
이직한 곳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모르겠어요.
sticker sticker



내가 그랬다.


갑자기 바뀐 환경도 적응이 안되는데, 모르는 사람들 투성이고, 게다가 이미 다들 점심짝꿍들이 있어서 그 무리의 틈새를 끼어 들어가기에는 나의 철판이 그리 두껍지 않았다.


그리하여 프로 혼밥러가 되었으니, 맥*날드, 닭볶음탕 집, 칼국수집, 백반집 여기저기 혼자 돌아다니며 알지도 못하는 맛집을 찾아다녔다. 물론 가성비 떨어지면서 외국인 여행자를 위한 밥집에 혼자 들어가 비싸고 맛없는 밥을 사 먹는 우를 종종 범하기도 하였다.

'인생 Lessons & Learned'를 하루하루 쌓아가며 보냈으니, 그리하여 이직 직후의 맛이 어떠하냐고?



노맛, 그냥 맛이 없었다.



우울하고, 외로웠고, 심난했다. 일이 힘든 건 아닌데 왠지 정신적으로 지쳤다.

'이런 망할, 내가 이러려고 이직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기간도 잠시. 금세 적응이 되어 혼밥이 맛있어지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직한 직장이 '우리 회사'가 되어갔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험난한 여정에 직면하게 되는데.... To be continued.



*회자정리 [會者定離] : 네이버 통합검색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로,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별의 아쉬움을 나타내는 말




'퇴사와 이직을 복기' 하는 <퇴사해도 되는 사람> 은 목요일에 열어요.

https://brunch.co.kr/magazine/teoisanejik

(퇴사 앤 이직)

브런치로부터 작가 승인이 나고 목요일마다 '작가의 서랍' 안에 들어 있던 조각난 글들을 모아 꺼내고 있어요. 브런치 작가 신청을 할 때 브런치팀과 약속한 '어떤 글을 써주실 수 있나요?'에 대한 답변을 지키기 위함이지요. 제가 직접 퇴사와 이직을 경험하며 느낀 것들, 그리고 친구들, 지인들과의 퇴사 상담했던 세밀한 수다들을 털어 볼게요. 비밀이에요.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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