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선영화로 TV 방영된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다가 마지막 장면에 만년필이 나오길래 냉큼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었다.'김 지 영' 이라고 각인 되어있는푸른색 만년필은 기품있고 단아해보였다. 문득 그 모델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인터넷 포탈에 '82년생 김지영 만년필'이라고 검색해 보았지만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땐 집단지성이 필요하다. 생애 첫 만년필인 플래티넘 센츄리를 구입하면서 가입한 네이버 만년필 카페 <문방삼우> 에 글을 올려 보았다.
'82년생 김지영 영화에 나오는 만년필 무엇인지 궁금해요.'
라고 올린 나의 글에 댓글이 무려 10개 넘게 달렸다. 만년필을 향한 덕심이 가득한 카페회원들의 댓글을 훑어보았는데 놀랍게도 의견이 분분했다.플래티넘 사르트르 블루, 세일러 프로미네이드 (프롬나드), 세일러 프로피트 스탠다드14K 블루 같다고 저마다 의견을 달았는데 브랜드는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일본산 만년필이라는의견으로 좁혀졌다. 영화를 보며 나 역시도 왠지 유럽산 만년필은 아닐 것 같다는 짐작을 했다. 댓글 달아준 만년필 카페 회원들과 같은 마음이었으니 이제 나도 만년필 중수쯤은 된걸까 하는 마음에 으쓱했다.
집현전에는 '만년필 아파트' 가 있다. 2층 짜리 아파트인데 3층에는 옥탑방이 있다. 바로 다이소에서 산 2칸짜리 투명 아크릴 서랍이다. 그 위에 옥탑방은 '대만의 실수'라고도 불리는트위스비 만년필을 구입하고 받은 투명 케이스로 마련해둔 공간이다. 크기가 작아 다이소 서랍위에 두었는데 그 모습이 꼭 옥탑방 같다.
만년필 아파트는 총 7자루의 만년필이 살고 있다. 로얄층이자 주인집인 2층에는 보기만해도 배부른 만년필 3자루가 들어 있다. 중고로 들여왔지만 내가 너무나 아끼는 파일롯트 캡리스 데시모, 시할아버님이 사주신 파커 듀오폴드 센테니얼, 내 생애 첫 만년필 플래티넘 센츄리로 라인업 되어 있다. 그 아래층은 좀 바글바글하다. 트래블러스 컴퍼니에서 만든 카웨코 브라스 만년필, 라미 만년필이 그것이다. 1층은 전세를 주었기 때문에 1층 만년필 라인업은 자주 바뀐다. 때로 잉크 카트리지나 잉크를 넣는 주사기 등 만년필 악세사리들이 자리를 차지하곤 해서 복작복작하다. 옥탑방의 주인은 트위스비 투명 만년필이지만 이 아파트에서 가장 젊어서 자주 집을 비우고 여기저기 필통을 타고 돌아다닌다.
집현전에 주소를 둔 이 만년필 아파트는 그래도 다른 문구류를 보관한 공간보다 특별하다. 문구를 보관해 둔 공간을 구역별로 나누자면 가장 비싼 동네이기도 하다. 부티 나는 아이템 이라 집현전에서도 주인의 오른손과 가까운 입지 좋은 곳에 살고 있다. 주인이 부지런하지 못해서 가끔 잉크가 마르는 현상도 있는데 그럴 땐 금이야 옥이야 만년필을 물에 씻어 달래고 내 손이 새카맣게 되더라도 그쯤은 희생하며 잉크를 채운다.
집현전에 주인이 집을 비우면 만년필 아파트에 사는 만년필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지난밤 주인이 썼던 일기장에 대해 속닥거릴지 그들만의 수다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