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과 미니멀리즘의 모순

나는 왜 때문에 노트를 쟁여둘까?

by 아코더


삼겹살 추가 주문과 같은 노트 쟁이기

회식을 하러 고깃집에 갔다. 고기를 구워 먹을 때 불판 위에 고기가 끊기면 안 된다. 주문한 고기의 반 이상을 먹어갈 즈음 눈치 빠른 누군가가 외친다.

‘사장님, 여기 삼겹살 2인분만 더 주세요.’



문구도 그렇다. 끊어지면 안 된다. 그래서 쟁인다. 당장 쓰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쓸 것이기 때문에 쟁인다. 아날로그 기록의 화룡점정이 되는 캘리그래피를 배우기 시작하며 인터넷으로 붓펜을 샀다. 3만원 이상 무료배송이라는 것도 이유가 되긴 했지만 역시 리필이 많이 있어야 마음의 안정이 되므로 3만원이 될 때까지 리필을 장바구니에 가득 담았다. 어차피 앞으로 계속 필요할 테니까. 미니멀리스트이며 미니멀리즘을 지향하지만 아날로그 기록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문구류만큼은 늘 부족하지 않게 쟁인다.


얼마 전 평화롭기로 유명한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트래블러스노트를 구입했다. 집에 노트가 많긴 하다. 하지만 하늘 아래 같은 노트는 없다. 각 노트에는 응당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 한 때 ‘물욕 리스트’를 적으며 물욕을 다스린다고 썼던 블로그 글이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노트를 구입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게 뭐라고. 늘 소득 없이 돌아오긴 했지만 대형 문구점에 5번 이상을 방문했다. 중고시장에 그 물건이 나왔다. 두뇌 풀가동이다.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말 나에게 필요할까? 내가 사두고 안 쓰면 어떡하지?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데 쓸 때 없이 쟁이는 게 아닐까? 결국 원하는 아이템을 구매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를 적은 끝에 손은 스마트폰을 향했고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노트 구매 원합니다.’



짬뽕 한 그릇을 건더기와 국물까지 야무지게 다 먹으면 뿌듯하다. 몰스킨 노트의 마지막 한 페이지를 꼬박 다 쓰면서 이와 비슷한 뿌듯함을 느꼈다. 노트 마지막 페이지에 방점을 찍은 그 순간 기록력은 상승했고 기록 레벨이 올라갔다. 비로소 기록계 하수에서 중수로 진화했다. 기록을 위한 툴을 살 때의 고민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권을 다 써 봤기 때문이다. 기록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다 쓰게 되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한 권을 다 쓰는 뿌듯함을 알기에 쟁이면서도 더 이상 걱정 없이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다. 어차피 있으면 잘 쓸 테니까.


미니멀과 덕질 사이

나는 미니멀하면서도 미니멀하지 않다. 실용을 추구하면서도 실용적이지 않은 것을 사고 싶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

휘뚜루 마뚜루 입을 수 있는 검은색 옷을 즐겨 입는다. 김칫국물이 묻어도 적당히 세탁을 해 주면 되기에 하얀색보다는 검은색이 좋다. 주차장에 가면 사람들이 검은색을 많이 선호한다는 걸 볼 수 있다. 특히 차 번호판에 ‘허’나 ‘하’가 붙어있는 임원용 고급 외제차 혹은 고가의 국산차들을 보면 죄다 검은색이다. 종종 비둘기색 차도 있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영 별로다. 왠지 최소 회장님은 타야 할 듯한 느낌이랄까. 개인적인 취향을 존중해 드려야겠지만 역시 블랙이 주는 매력, 무난함과 고급스러움 때문인지 검은색 차가 앞도적으로 많다.

블랙은 진리다. 가지고 있는 노트의 대부분은 검은색이다. 스탈로지 노트도 검정, 몰스킨 하드커버 노트도, 몰스킨 노트도 검정이다. 뜯지 않은 몇 권의 노트들도 대부분 검은색으로 쟁였다. 특히 대형 문구점에서 블랙 프라이데이 같은 할인 기간에 몰스킨, 로이텀, 스탈로지 노트 등의 고급 노트류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구입을 주저하지 않고 야금야금 지른다. 그런 덕분에 향후 3년은 너끈히 쓸 분량의 노트를 구비해 두었다. 어차피 쓸 (예정인) 노트들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현명한 구매 아닌가 하는 뿌듯함에 책장에 꽂힌 노트들을 쓰다듬는다.



초록 사랑

초록색을 좋아한다. 인생 첫 만년필은 초록이었다. 상대를 위한 배려라는 이유와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 눈을 편하게 해주는 풀색 비슷한 초록색으로 메신저 폰트 색을 바꿀 정도로 초록색 마니아이다.

어느 날, 중고거래를 통해 초록색 노트를 들였다. 검정 다음으로 초록색을 좋아해서 초록색 노트를 샀다. 중고시장에 잘 나오지 않는 희귀템. 절대 안 쓰고 눈으로만 볼 테다. 실용적인 몰스킨 노트는 실용적이지 않게 되었으나 노트를 볼 때마다 행복하다. 이것은 마치 원피스 덕후들이 뜯지 않은 원피스 만화책을 한 세트 더 구입해 책꽂이에 꽂아두고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변태 같은 심리

사지 않아도 펜과 노트를 보러 문구점에 자주 들른다. 가서 새로 나온 펜을 써보기도 하고 새로 나온 노트를 살펴보기도 한다. 문구점에 자주 가다 보니 할인 기회가 왔을 때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브랜드가 이렇게 세일을 한 적이 없는데!’ 그럴 땐 주저 없이 산다. 그렇게 할인 기간에 600원 할인해서 샀다가 얼마 지나 할인이 끝나 정가로 파는 걸 보면 짜릿함을 느낀다. 앗싸. 지난주에 쟁이길 잘했어! 하고 흐뭇한 미소를 띤다. 아날로그 기록을 즐기는 문구 덕후들은 이해하리라.


나는 정말로 미니멀리스트이지만 덕질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기록에 대한 의지가 있는 기록 덕후 중수 이기 때문이라고 마무리하련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