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양양으로
주문진으로 갈까?
강릉은 너무 멀어.
양양읍내로 갈까? 그게 제일 좋을 것 같긴 한데.
나는 현남면이 좋아…
대목? 가성비 좋은데…
아마 양양에 내려올 생각을 했다면 누구나 한다는 그 고민을 다시 시작했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움직여지지 않았고 말로만 아파트를 이야기 했지 한번도 어딜 가서 본적도 없다.
그래서 그냥 무리해서라도 지을까? 로 기울어 가던 즈음…
양양에 이미 살고 있는 친구가 택지를 제안했다.
이미 11명의 사람들이 모여 택지를 조성했고 조성할때 나에게 이야기 할까 했지만 이미 북분리를 설계중이었던 때라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했다.
친구는 내가 북분리 설계를 중단했기 때문에 이야기한건 아니었다.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냥 11명의 사람들 중 한명이 그곳에 정착하기 어려울것 같다고 했고 그래서 그 택지자리를 누군가에게 팔아야 할 상황이 된것이다.
11명은 이미 모두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냥 부동산에 내놓고 팔기는 애매했고 북분리 때문에 안들어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물어나 봐야겠다 싶어 물어보는거라 했다.
돌아보면 정말 기가막힌 타이밍이었다.
나는 그리 내키지 않았다. 친하든 친하지 않든 아는 사람들이랑 마을을 이룬다는것이 낯설었고 그리 친근한 성격이 못되는 나는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하고싶어했다. 부동산에 관한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는 사람인데 땅을 보러 다녀와서 그 택지에 들어가고 싶다고 명확하게 말했다.
무언가를 감으로 잘 선택하지 않는 사람인데 그냥 하고 싶다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맨 앞줄 센터 아니면 안할래”
그도 그러자 했다.
다음날 우리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위해 그 일을 진행하는 H를 만났다.
“맨 앞줄 센터”
안내킨다는 말을 맨 앞줄 센터라고 이야기했는데
이건 그의 말을 따르라는 하늘의 계시인가보다.
그렇게 우리는 땅이 생겼고 대출은 늘어났다.
집은 자금 문제로 조금 늦게 짓고 싶었지만 11가구 중 대부분이 건축을 하는 조건으로 땅을 매입한 상황이라 우리도 건축을 해야했다.
계약을 하고 그날 밤 밤새 그간 내가 살고 싶은 집의 구조를 고민했다.
아주 고전적이고 어쩌면 촌스러울 빨간 벽돌의 삼각지붕의 집
집을 지을때 외관부터 고민한 건축이라고는 1도 모르는 나는 그냥 짓고 싶은 모양의 집을 그리고
거기에 공간을 배치하는 순서로 집을 그렸다.
배운적도 없는 스케치업을 마스터해가기 시작했다.
집을 짓는다는건 결국 나와의 엄청난 싸움이었다.
포기할것과 취해야 할것들을 선택해야했고 동시에 4채가 올라가게 된 상황에 나는 쓸데없이 오지랖을 부렸다.
우리집에서 문제가 된것들을 옆집에서 문제되지 않기를 바랐고 한겨울 차디찬 공기를 마시며 매일 같이 현장으로 출근했다.
현장의 수많은 반장님들과 모두 다르게 생긴 4채의 집의 구석구석에 생기는 문제점들을 타협해 나갔다. 사람들이 현장소장이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그때그때 이런저런 방법들을 생각해 내는게 전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을까 싶다. 정말 힘들었고, 힘들었다.
우리집을 포함한 4채의 건물이 건축되는걸 보면서 나는 인생을 배웠다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1채만 지어도 10년은 늙는다는데 그 현장 한복판에서 굳이 안해도 될 경험과 감정까지 얻었다.
물론 그래서 배운것도 많다.
이 과정 역시 책한권은 쓸 수 있을것 같지만 이 이야기의 중심은 아니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 집이 두번째로 완공되었고 가장 먼저 이사를 했다.
여전히 카페는 동산에서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나는 종종 새로지은 터에, 아무도 없는 집에 덩그러니 놓여있곤 했다.
모두가 무섭지 않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같은건 들지 않았다.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답고 멋진 풍경속에 들어와 있었다.
거실어디서든 너른 들판과 낮은 산등성이가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빨간 담을 쌓았다. 안락하고 안전한 우리의 집을 완성하기 위해…
그렇게 갑자기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이 순식같에 집이 생겼다.
다들 10년은 늙는다는 집이 다 지어지자 마자 나는 다시 북분리를 짓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