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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스윔 Nov 18. 2023

9. 다시,건축

서울에서 양양으로

우리는 정말 건축에서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우리를 잘 이해해주는 좋은 건축설계사님들을 만났고

우리를 믿어주는 좋은 소위말하는 “건축업자”를 만났다.


집을 지어주셨던 분과 그대로 북분리까지 건축하기로 했다.


그것은 1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가감없이 보여준 그분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다.

사람들마다 다르게 바라볼만한 일들이 무수히 많았고 나는 그 속에서 내가 보고 싶은 방향으로 그분을 보았다.


북분리는 아주 큰 공사였다.

나보고 어디 연락해서 포크레인을 부르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싶다.


토목공사부터 주차장, 진입로 계획 등등 그냥 내가 덤벼서 지시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어찌 공사가 시작되고 예쁘게 땅이 다져지는 가운데 토목공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경계까지 어느정도 자리가 잡혀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가고 있었다.


아쉬운건 코너의 땅이었다. 저부분만 있었다면…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미 공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47전, 저 부분이 우리의 땅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우리도 없었을지 모른다.
어떻게든 살려보고 싶었던 욕심이 아주 가득했었다.


그런데 토목공사가 끝나던 마지막날 붙어있는 땅의 주인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땅을 매매할 계획이 있는데 매입 하겠느냐”고...


앞으로 보나 뒤로보나 이건 무조건 사야 하는것이었다.

사겠다고 했다. 사방팔방 돈을 빌렸다.


사겠냐는 제의에 사겠다고 답한 다음날 법무사 사무실에서 만나 도장을 찍었다.

다시 토목공사를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건축을 시작했다.


근생시설이니까 평당 600정도에 계획을 세웠지만 실상 우리는 주택과 다름없는 수준의 건물을 지었다. 한 건물에 3층으로 지은것도 아니고 똑같이 생긴 건물 3개를 지은것도 아니다.

처음엔 힐러스가 아니라 스페이스 코즈라는 이름을 할까 했었다.
다시 지으라고 하면 꿈은 조금만 담고 돈을 담도록 짓겠다고 다짐했다가 막상 돌아가면 다시 꿈을 담지 않을까 싶다.

하나는 독채 스테이로, 하나는 사무공간으로, 하나는 카페 겸 스테이로 3동을 지었다.

평평하게 했으면 훨씬 수월했을 지붕도 삼각이 3개가 있는 형태로 구성했다.


2층의 객실은 각 방마다 다른 타일을 사용했고 바닥마감도 다르게 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이미 집을 지을때 터졌고 건설자재 수급문제, 인건비 상승문제 금리 인상 문제등 셀수 없이 많은 요소로 평당 600은 택도 없는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대출도 안나온다고 했다.

돈이 어디 구멍난것처럼 줄줄 새어나갔다.


매일 나한테 언제 이 돈이 있었지? 오천만원으로 시작했던 양양에서의 시작이 어떻게 여기까지왔지? 싶은 질문이 매일 반복되었고 뒤로는 온갖 대출로 매꿔진 힐러스가 세워지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2층까지 올라간 콘크리트 상태의 건물을 보며 건축해주시는 분과 이런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지금 무슨짓을 한거냐”

사실 그때 나는 꽤 지쳐있었다.

여기까지 되었을 무렵... 쭈구리고 앉아 이야기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2년을 내리 공사장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20년을 사무실에서 키보드나 두드렸지 건축의 ㄱ도 모르는 나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건축물을 보며 그 과정에서 만난 무수히 많은 일들과, 사건들, 문제들을 마주하면서 나는 점점 고민이 많아졌다.


이 건축물이 완공되면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


양양으로의 이주가 나에게 주는 희망은 무엇이었으며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그 사이 나는 나의 직업에 대한 고민이 더 늘어갔다.


20년이 되면 은퇴하겠다고 했던게 무색하리 만큼 나는 많은 글을 썻고 책을 낼까 하는 고민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아직 나 스스로를 '그정도는 아닌사람' 으로 치부했고 직업에 관련된 그 글들은 모두 서랍속으로 들어갔다. 


건축이 완료되어 갈 무렵 하고싶은걸 담은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공간과 장소에 대한 책을 읽고, 양양군청의 홈페이지를 매일 들락거렸다.

내가 좋아하는 양양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궁금했고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있을지 고민했다.


한편으로 내 직업에 후배들이 생기길 바랐고 그래서 교육과정과 서비스를 만들어 볼까 하는 고민까지 2년 사이 무수히 많은 고민을 했다.


6월의 어느날


그렇게 시간이 지나 힐러스라는 이름으로 카페를 오픈하고, 스테이를 오픈했다.


그리고 내 꿈을 펼쳐볼까 용기내고 싶을쯤, 이제 더이상 가용할 자금이 없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이제는 진짜 현실이 되었다. 오픈하면 굶어죽진 않겠지 했지만 굶어죽게생겼다.

코로나가 끝났고 여행객들은 해외로 나가기 시작했으며 양양의 이미지는 "클럽,술,춤,파티"로 핫해지고 있었다. 


도시에 지친 사람들의 삶에 틈의 오아시스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나의 바램을 담은 힐러스는 명함을 내밀 곳이 없었다.


사방에서 워케이션을 이야기 했고 이미 2년전 워케이션을 이야기 하며 고민했던 나는 워케이션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랬다. 모든것이 변하고 있었다.

나도 변해야했다.


대형 카페도, 대형 숙박시설도 아닌 우리는 우리만의 색을 찾아야했다.

돈, 시간, 마음, 모든것을 쏟아부어 만들어낸 우리의 결과물에 우리는 책임을 져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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