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모기에 엄청 많이 물려서 화가 난 상태였다. 천장을 보니 배가 불룩 튀어나온 모기가 있었다. 방 전체에 뿌연 연기가 찰 정도로 에프킬라를 뿌렸다. 그러자 방 안에 숨어 있던 벌레들이 모두 튀어나와 괴로워했다. 나도 괴로웠다. 연기가 모두 빠져나가지 않게 창문을 아주 살짝만 열고 숨을 쉬었다. 내 피로 배를 채운 모기를 죽이고 배를 갈랐다. 배 안에는 피가 저장되어 있는 튜브가 있었다. 내 피인데.
잠에서 깨보니 실제로 모기가 엄청 많이 물려 있다. 그런데 모기가 없다. 실제로 내가 에프킬라를 뿌린 건지 단지 꿈이었는지 헷갈린다.
- 2022.11.4 일기 중 -
2023년 4월 1일. 붉은 지붕과 푸른 대서양의 대비가 아름다운 포르투갈의 수도, 나는 지금 리스본에 와 있다.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때의 영광을 머금은 이 도시를 보기 위해선 일주일을 머물러도 모자랄 것 같았지만 나는 미련 없이 도시를 등지고 북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효율중독 시대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비효율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스페인을 가기 위해서 포르투갈에 왔다. 쓰고 보니 더 이상한 말이지만 사실이다.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대성당에 가기 위해 20시간 넘게 비행을 해서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했다. 그리고 산티아고대성당을 향해 지금부터 3개월 동안 걸을 예정이다.
꽤나 버거운 겨울을 보낸 후 따듯한 봄에는 나에게 휴가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반백수 프리랜서였기에 모아둔 돈은 없었지만 대출을 받아서라도 쉬기로 했다.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몸뚱이를 데리고 가장 저렴하게 3개월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내가 아는 가장 돈이 적게 드는 행위는 등산이었다. 3개월을 보내기에 강원도 고성 진부령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종주가 딱일 것 같았다. 산속에서 숨을 쉬면 거실 소파에서 숨을 쉬는 것보다 저렴할 것이다. 뒤늦게 산불방지기간(우리나라 국립공원은 건조한 4-5월에 산불방지를 위해 등산객 출입을 제한한다.)에 대해 듣고 좌절하고 있던 중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듣게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여러 시작점에서 스페인에 있는 산티아고라는 도시까지 걷는 길이다. 별로 여행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굳이 유럽까지 가서 걸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알베르게라는 시스템에 대해 들은 후 마음이 동했다. 알베르게는 산티아고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만 이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인데 하루에 5~15유로(한화 10,000원~25,000원)라는 가격에 숙박과 식사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유럽을 여행할 수 있다니 나쁘지 않은 옵션이었다. 하루종일 걷기만 하니 살도 빠질 것 같고 배낭을 메고 다니니 쓸데없는 쇼핑 할 일도 없을 테니 아무것도 안 한다는 죄책감에 감정소비를 하며 시간을 쓰는 것보다 가성비 좋은 숨쉬기 방법처럼 보였다. 그 가성‘비’에 내 소중한 연골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당시에는 몰랐다.
시작은 상큼했다. 7시쯤 눈을 떠 호텔 정원에서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오늘 루트를 체크했다. 어제 하루 리스본 관광을 하며 3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었기에 오늘 여정에 자신감이 넘쳤다. 리스본 시내를 떠나기도 전에 설렘은 금세 걱정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의 응원을 받으며 호기롭게 호스텔을 나섰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산티아고가 나오는지를 몰랐다. 사람들에게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물으며 은근히 ’나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 걸을 거야!‘를 은근히 과시했다. 그러나 설렘은 리스본을 떠나기도 전에 걱정으로 바뀌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10kg의 배낭의 무게가 발바닥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배낭을 잘못 멘 것은 아닌가 싶어 몇 번이고 멈춰서 배낭끈을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발바닥은 금세 땀으로 가득 찼다. 미키마우스처럼 발이 커진 기분이 들었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오늘이 끝나기도 전에 내일이 무서워졌다.
‘왜 10킬로그램이 되어야 했을까...’
걸으며 배낭 안에 든 물건들을 스캔했다. 나의 불안을 잠식시켜 주길 바라며 챙겨 온 철학 서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에 챙겨 온 촬영 장비들.
나를 괴롭히는 것들은 모두 나였구나.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나의 욕심들이 나의 발바닥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난 이것들을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미안하다. 얕봤다.
D+1 포르투갈길 1일 차
루트 : Lisbon – Alverca do Ribatejo (약 30km)
순례길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움막 하나 없는 드넓은 평야와 지평선 끝 언덕에 솟아 있는 십자가, 그리고 그것을 향해 걷고 있는 한 사람이다.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성지 순례길이기에 가슴이 웅장해지는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순례길은 생각보다 참 별 게 없다.
걷다 보면 내가 지금 포르투갈에 있는 건지 충남 논산에 있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조금만 더 걸으면 잠실이 나올 것 같은 아스팔트 자동차 도로(게다가 갓길도 없어 로드킬 당하기 딱 좋은), 할아버지 댁 가는 길에 본 것 같은 비포장 길, 한강 러닝 트랙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강가 옆 트랙까지,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많은 시간을 이런 길 위에서 보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밭 길을 한참 걷고 있는데 뒤에서 한 순례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걷는 길에 순례자를 마주치는 것은 처음이기에 반가운 마음에 일부러 걷는 속도를 줄였다. 러시아에서 온 이 순례자는 나처럼 이번이 첫 까미노라고 했다. 15 킬로그램은 족히 넘어 보이는 그의 배낭을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배낭 안에 어떤 것이 들었는지 물었다. 배낭 부피의 반은 응급치료용품이고 그의 가장 큰 불안은 다치거나 아픈 것이라고 했다. 그도 나처럼 지난 이틀간 배낭에서 무엇을 덜어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한 듯했다.
“어떻게 순례길을 걷게 되었어?”
순례자가 물었다.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산티아고 순례길이 논산의 논 길과 별반 다르지 않듯 내가 순례길을 걷게 된 이유에는 그다지 거창한 것이 없었다. 퇴사, 이혼 등의 인생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맞은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치열하게 살아오다 번아웃이 온 것도 아니다. 마침 프로젝트 하나가 끝나서 시간을 낼 수 있었고, 쉬는 김에 운동을 제대로 못해 떨어진 체력도 좀 올리고 싶었고, 그 김에 겨울 내 찐 살도 좀 빼고 싶었고, 적당히 해외여행도 하면서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해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운명의 연인을 만나면 더할 나위 없고.
이 사소한 많은 이유들을 한마디로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운동이 될 것 같아서’라고 짧게 대답했다.
“나는 나의 영혼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왔어. "
그 표현이 부담스러우면서도 뭔가 비장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내가 가진 사소한 이유들을 모아보면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는 지금 충남 논산에 있습니다
D+3 포르투갈길 3일 차
루트 : Azambuja - Valada (약 13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