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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쓸 수가 없다. 아무 생각도 안 난다.
산세바스티안에서 5일을 쉬었다. 몸이 나아지려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조금씩이라도 걷기로 했다.
비가 오면 추워서 패딩을 입고 걷는다. 걸으면 땀이 나서 우비 안과 밖이 다 젖는다. 머릿 속도 젖은 스펀지처럼 무겁다. 그래도 걷는데 문제는 없다. 사실 더 잘 걸어진다. 진통제 탓인지 근육이 안 느껴져서 힘든 줄도 모르겠다. 오르막길을 올라도 숨이 안 찬다.
비가 오다 말다, 해가 떴다 다시 비가 오기를 반복한다.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판초를 입었는데 물이 안까지 다 샌다. 싼 거라 그런가? 원래 우비라는 것이 백 퍼센트 방수가 되는 건 아닌 건가? 모르겠다. 발이 젖든 배낭이 젖든 옷이 젖든 별 생각도 없다. 오랜만에 헤드윅 OST를 들으며 걸었다. 풍경도 예쁘겠다, 코로나에 취했겠다, 신나게 춤도 췄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21유로였다.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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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4 북쪽길 2일 차
루트 :San Sebastián-Zarautz(약 22km)
코로나에 걸린 후 몸에 이상한 변화들이 생겼다. 일단 이가 시리다. 칫솔이 이에 닿기만 해도 시려서 이를 닦을 수 없다. 후각과 미각이 사라졌다. 미각이 사라진 세상은 처음이라 당황스럽다. 음식들이 다 목을 막히게 하는 젖은 모래처럼 느껴진다. 딸기를 베어 물었는데 입에서 그냥 녹아 없어지는 게 마치 공기를 씹는 느낌이다. 배고픔은 느끼면서도 먹기 시작하면 지난한 턱 노동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던 기억으로 먹는다.
미각뿐만 아니라 몸의 여러 감각이 잘 안 느껴진다. 오르막길을 오르면 당기던 다리 근육도, 매 발걸음 참아야 했던 발뒤꿈치의 통증도 사라졌다. 숨이 찰 때 가슴이 답답한 느낌도 사라졌다. 숨이 가빠져도 부수적으로 느껴지는 여러 증상이 없으니 숨이 찬다는 느낌이 안 든다. 덕분에 오르막길을 거침없이 오르게 되었다. 무통주사를 맞고 걷는 기분이다. 나는 무통인간이다.
나는 무통인간이다
D+45 북쪽길 3일 차
루트 :Zarautz-Deba(약 24km)
"그래서 여기는 비가 내리다 말다 하는 게 일상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자연이 아름답지"
이 놈의 동네에서는 도대체 해는 언제쯤 볼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원주민의 낭만적인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 오는 길이 예쁘긴 예뻤다. 이쪽 동네도 해가 뜰 때도 있긴 하다는데 나는 아직 못 봤다. 북쪽길은 힘들다는 그 명성만큼 계속 산 길을 걷는다. 몇 시간 동안 산속을 걷다가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면 유난히 더 반갑다. 판초우의와 등산스틱을 들고 진흙범벅이 된 사람들이 모여든다. 따듯한 물의 샤워가 퇴근 후 맥주 한 캔처럼 유난히 더 시원하다. 걸으며 작고 큰 마을들을 지나치는 포르투갈길과는 확실히 다른 바이브가 있다. 이렇게 걷다가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진짜 감동적이긴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후각과 미각이 없는 채로 음식을 씹었다. 미각이 배가 부르다는 감각에 많은 영향을 미치나보다. 전에는 배가 부른 건 감각으로 알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내가 배가 부른 건가 아닌가 한참을 생각한다. 생각 없이 음식을 삼키다 보면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제야 ‘배가 부르는구나’ 깨닫는다. 그냥 내가 바보인 건가?
하루종일 비를 맞으며 걸어서 많이 추웠는데 알베르게 샤워실에 뜨거운 물이 안 나와서 몸의 한기가 가시질 않았다. 슈퍼에서 따듯하게 데워먹을 수 있는 수프를 사 와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다. 방에 두꺼운 담요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춥진 않았지만 따듯하지도 않았다. 따듯한 방에서 자고 싶다. 내일은 꼭 해가 뜨면 좋겠다.
그래서 해는 언제 뜬다고?
D+46 북쪽길 4일 차
루트 :Deba-MarkinaXemein(약 25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