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2023. 08. 20
3개월 동안 걷기만 하다 돌아오면 일상생활이 낯설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순례길을 걸었던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익숙했다. 발의 통증만이 그 날듯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첫 4일은 정말 잠만 잤다. 돌아오자마자 가려고 했던 정형외과는 일주일 만에 갈 수 있었다. 예상대로 관절염과 족저근막염 진단을 받았다. 10분 이상 걷지 말라는 처방을 받았다.
익숙한 일상엔 순례길 가기 전 내가 가졌던 문제의 냄새가 진동했다. 이 냄새가 내 몸에 배는 게 싫어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니 답답했다. 옷장 가득한 옷, TV 아래 쌓여있는 책의 제목들, 집 안 가득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과거 내가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향수와 이루지 못 한 나의 욕망들을 일깨웠다. 현재가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꼴도 보기 싫었다. 이 모든 것들이 발의 통증과 연결되었다.
순례길에서 느꼈던 것들을 일상으로 가져오고 싶었다. 일단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꾸기로 했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서적을 가리지 않고 보았다. 자타공인 맥시멀리스트로 살아오던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리왕 곤도 마리에의 책 제목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처럼 최소한 설레는 것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니멀리즘은 지난 것들을 뒤로할 수 있게 하는 거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위한 공간 틀을 만들 수 있게 말이야.’
- 다큐 <미니멀리즘, 오늘도 비우는 사람들> 중 -
막상 펼쳐 놓고 나니 어떤 걸 버리고 어떤 걸 남길지 잘 몰랐다. 다시 한번 순례길 배낭 싸기에 도전하는 기분이었다. 정리하며 가장 중점에 둔 것은 내가 앞으로를 살아가는데 이것들이 필요한가? 였다. 물건들에는 나의 역사도 함께 저장이 되어있었다. 고민했지만 지금부터 함께 할 내 공간에는 과거를 회상하는 즐거움보다는 미래를 위한 자리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75L 봉투 5개 이상의 쓰레기, 200점이 넘는 기부, 아직 처분하지 못 한 박스들이 창고 안 가득하다. 많이 비워냈기에 끝난 후에는 집 안이 텅텅 빌 줄 알았지만, 그 많은 물건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로 겉보기에는 이전과 별 다를 바 없었다. 달라진 점을 찾자면 이제는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 (혹은 가지고 있지 않은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는 것이다.
비워내면 숨통이 트이고 엄청 뿌듯할 줄 알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버린 터라 후련함보다는 피로함이 압도했다. 잘 정리된 이 공간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설렘이라는 이름으로 남겨진 물건들과 나의 관계가 어떻게 유지될지도 모르겠다.
순례길에서 느낀 것들을 현실에 가져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나는 삶은 여전히 불안하다. 한 주에도 몇 번이고 마음이 가득 차고 비워지길 반복한다. 아마 나의 공간도 지금처럼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비움의 과정이 의미가 없진 않았다. 내가 가진 것들을 하나씩 만져보고 관계하는 과정을 통해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망할 곤도마리에
2023. 12. 20
분명 설레지 않는 건 버리라고 했다. 그래서 팬티 두 장과, 브레이지어 두 개, 양말도 네 켤레만 남기고 다 버렸다. 결국 속옷 세트와 양말 세트를 대량 구입했다. 설레지 않는 건 버리라고 해서 버렸는데 겨울이 추운 겨울이 오니 설레지 않아도 생존을 보장했던 옷들이 그리웠다. 급하게 겨울을 나기위해 필요한 것들을 사들였다. 전혀 쓸모가 없지만 분기별로 나의 자잘한 욕망을 채워주던 쓸모없는 잡동사니들도 그리웠다.
한 달이 넘는 시간과 에너지를 써서 비운 집은 조금씩 또 다른 잡동사니로 채워졌다. 괜히 비워서 돈만 더 썼다. 미니멀리스트를 꿈꾸다니. 오만했다. 나는 그냥 맥시멀리스트로 살다 죽을테다.
어차피 다 좆밥이다.
2024. 4. 15
순례길에서 비웠던 마음은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우울증약을 먹기 시작했고 신경증으로 인해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냥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려니, 내 팔자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겠거니 생각하며 일상생활이 지속 가능할만큼만 괜찮게 지낸다. 사실 우울하고 예민하고 게으른 내가 꽤 마음에 들기도 한다. 개그우먼 장도연이 어느 강연 방송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어차피 다 좆밥이다.’
나보다 훨씬 잘 났고 완벽해보이는 사람들도 다 비슷비슷하게 버티면서 살아가니까 쫄지 말라는 의미로 한 이야기다. 혹여나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마음이 조급해질 땐 이 말을 마음 속으로 되새긴다. 어차피 다들 불안해하고 고민하면서 사는 거다. 우리는 다 좆밥들이다. 비겁한 정신승리인가 생각될 때도 있다. 근데 뭐 어때. 인생이 원래 정신승리인데.
일단 걸으면 어디로든 간다.
2024. 6. 7
미니멀리스트 되기에는 실패했지만 내가 순례길에서 피부로 경험하고 지금까지 유지하는 감각이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욕심이 너무 크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걸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길이 주어졌을 때 다 걸어보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낸 경험을 몇 번 했다. 그때마다 생각을 멈추고 일단 걷기 시작했다. 생각없이 걷다보면 어딘가에는 도착해 있었다.
지난 수년간 창작자로 살아오며 뭔가 대단한 걸 만들어야한다는 욕심에 아무것도 못하고 지나친 날들이 많다. 주위 동료들이 몇 개의 작업을 하는동안 나는 고민만 했다. 사실 연애도 그랬고 집청소도 그랬고 다이어트 계획도 그랬다. 그래서 이번에는 못 먹어도 고 하기로 했다.
돈이 없으니 주위 친구들의 기술을 모아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산티아고에서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이미지로 전달하고 싶었다. SNS에 올린 산티아고 일기들을 모아 원고 형태로 재구성하는 작업도 시작했다.
대출금은 아직 이자만 갚고 있지만 여전히 돈이 안 되는 일만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순례길에 다녀온 이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 버튼을 끄는 기능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뭐 잘못하다 나락으로 갈 수도 있지만 요즘 정말 행복하다. 잘 하거나 잘 보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내가 느낀 것을 뱉어내는 일은 아주 즐거운 일이다. 10년 넘게 영상 제작을 해왔지만 요즘처럼 재밌던 적이 없다.
아는 감독님께 편집한 가편집본 영상을 보여드렸다. 영화를 보신 감독님께 전화가 왔다. 감독님은 전화를 받자마자 뭔가 화가난 것같은 목소리였다. 이미지들은 좋지만 별다른 고민없이 찍고 편집한 티가 난다고 했다. 하지만 좋은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 시간을 더 가지고 조금 더 열심히 고민해서 만들어 보라고 했다.
“영화에 당신의 얕음이 보여요.”
“그냥 제가 지금 얕으면 그냥 얕은 작품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굳이 깊어보이려고 해야할까요?”
감독님은 나와 영화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진심을 다해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고, 감독님이 지적한 디테일들에는 상당 부분 동의했다. 그리고 그 지적들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데에 분명 도움되는 말이라는 것도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내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지금 내가 허접하다면 허접한 모습을 솔직히 보이고 싶고 실패도 하고싶다. 남들이 보기에 좋은 작업보다는 내 것을 계속 만들어내고 싶다.
감독님은 나의 태도에 조금 실망하신 듯 했다. 그런데 난 모자란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고 끊어내려하지 않은 오늘의 내가 꽤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