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선택지는 두 개였다. 15킬로미터를 걸어서 빌라르 데 카스(Vilar de Cas)에 머물거나 루고(Lugo)까지 30킬로미터를 걷거나였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루고를 목표로 하고 있었기에 나도 웬만해선 루고까지 걷고 싶었다. 하지만 알베르게 벽에 붙은 문구 때문에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오늘 당신이 맞게 될 길의 첫 번째 반은 오르막길이에요.’
‘만약 살아남는다면, 그다음은 내리막길이 계속될 거예요’
산을 조금이라도 다녀본 사람은 내리막이 가장 힘들다는 걸 안다. 지옥에서 온 편지를 읽는 기분이었다.
발뒤꿈치에서 시작한 통증은 발바닥을 넘어 발가락까지 옮겨 왔다. 걷다가 보면 찌릿한 통증 때문에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럼에도 통증에 익숙해진 터라 잠시 멈췄다가 걸음을 이어갔다.
일찍 길에 나섰기에 빌라 데 카스에 도착했을 땐 오후 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시간이 많이 남으니 루고까지 걷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한 지 5킬로 만에 후회했다. 하지만 중간에 알베르게가 없기에 노빠꾸였다.
사실 오늘 걸은 길에 대한 기억이 잘 없다. 보통 걸으며 간략하게 느낀 감정들을 간단한 문장이나 단어로 기록해 놓고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하루의 일기를 완성한다. 그런데 오늘은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류의 고통의 외침만 적혀 있다. 그리고 실제로 끊임없는 오르막길이 있었다는 것과 고통의 감정 외에 기억나는 게 잘 없다. 찍은 사진도 없다. 그냥 고통을 인내하며 계속 걸었다.
힘들어. 발이 너무 아파. 죽을 것 같아.
D+81 프리미티보길 11일 차
루트 :Ocádavo-Lugo(30km)
어제 루고에 도착한 후 발바닥이 많이 아팠다. 알베르게 안에서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친구가 진통제를 챙겨 주었다. 고맙다며 받았지만 먹기를 주저했다. 순례길에 오기 전에 여러 약들을 먹으며 나의 몸과 마음의 통증을 억지로 잠재웠었다. 여기에서마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면 쉬어가고, 계속 아프면 걷지 말자. 결국 진통제를 먹지 않았다.
아침 10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카페에는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있는 순례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젯밤 신나게 술을 마신 탓도 있지만 오늘이 함께 걸었던 친구들과 헤어지는 날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알베르게 선택지가 많지 않아 매일 저녁 만나며 걸어왔다. 그런데 루고를 기점으로 누군가는 하루를 쉬어가고, 누군가는 더 걷기로 걸어간다.
나도 친구들과 잠시 이별하기로 했다. 프리미티보길을 걸으며 친구들을 따라가기 위해 매일을 무리하며 걸어왔다. 얼마 있지도 않은 소셜력도 바닥났다. 물론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들은 내 발의 고통 이상으로 가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내 페이스대로 걸어가기로 했다.
진통제
D+82 프리미티보길 12일 차
루트 :Lugo - San Románda Retuerta(약 19km)
내가 선택한 길들은 사람이 많은 프랑스길을 피한 선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 프리미티보길은 프랑스길과 합쳐지는 멜리데(Melide)라는 도시에 도착한다. 그리고 약 80킬로미터를 프랑스길의 수많은 인파와 걷게 될 예정이다. ‘프랑스길은 사람이 많아 며칠 전 알베르게를 예약하고 걸어야 한다’, ‘알베르게에 가려고 사람들이 새벽부터 걷기 시작한다’, ‘걸을 때 앞 뒤로 몇 십 명의 사람이 함께 걷는다’ 등 프랑스길에 대한 많은 루머를 들었기에 벌써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생각만 해도 기가 빨려서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멜리데까지 27킬로미터, 멜리데에서 산티아고까지 50킬로미터, 총 77킬로미터... 이틀 안에 이 길을 끝낼 수 있을까?’
마음이 조급한 만큼 걸음도 빨라졌다. 속도를 보려고 시계를 계속 확인하면서 걸었다. 몸의 움직임과 호흡에 집에만 집중했다. 한참을 걷다가 갑자기 현타가 왔다. 지금 뭐 하는 거지? 프랑스길을 피한 이유가 조급한 마음으로 걷기 싫어서인데 프랑스길을 피하기 위해 조급하게 걷는다? 완전 난센스였다.
속도를 줄이고 하늘을 바라봤다. 멀리 숲의 새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구름의 모양이 보이기 시작했고 머리 위에 펼쳐진 나뭇잎의 흔들림이 보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구나.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난 80일 동안 나의 길에 언제나 함께였던,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잡초와 들꽃들이 보였다. 이제 일주일 후면 이 길과도 이별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풍경들 하나하나에게 지금까지 함께 해줘서 고마웠다 인사를 하며 더 눈에 담았다.
순례길을 걸으며 ‘Camino de La Vida(인생의 길)’라고 불리는 이 길이 결국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끝이 죽음이듯이 이 길의 끝인 산티아고가 있다. 나의 매일의 발걸음은 결국 산티아고, 곧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관점으로 순례자들을 바라보면 빨리 산티아고에 도착하려고 노력하는 모습들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 처음으로 이 길이 끝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참 길기도 길었던 여정이었다. ‘내가 여기에 있지?’ 싶었던 적도 있고 그냥 걷는 것 자체가 즐거울 때도 있고, 텅 빈 길을 걷는 것이 외롭기도, 우연히 만난 이들 덕분에 따듯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대로 순례길을 걸으며 비슷한 실수를 하고, 비슷한 불안을 가지고 걸으며 비슷한 질문을 하고, 비슷한 대답을 얻었다.
이 길을 시작했을 땐 이 여정의 끝에 날아다닐 체력이 생길 것이라 기대했다. 실상은 그 반대다. 순례길 자체는 익숙해졌지만 몸은 더 안 좋아졌고 걷는 것은 더 힘들다. 자고 일어나면 평생 안 아파 본 근육들을 느낀다. 다리와 발의 통증 때문에 이제는 등산스틱 없이 걷지 못하고 배낭을 내려놓은 후엔 걸을 땐 잊고 있던 발의 염증 때문에 무릎을 펴고 제대로 걷기도 힘들다. 매일 밤 좁은 샤워실에 주저앉아 몸을 씻어 낸다. 다만 온몸의 통증이, 진흙길이, 비 오는 날의 젖은 양말과 신발이, 끊임없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아주 조금만 더 익숙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오길, 이 길을 걸어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드니 주마등처럼 걸어온 날들이 지나가며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이 길의 끝을 급하게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의 마음이 이럴까? 오늘의 길은 언제보다도 청명하고 선명하게 빛이 났다.
그럼에도 오길 참 잘했다
D+83 프리미티보길 13일 차
루트 :San Románda Retuerta-Melide(약 28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