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4 평가자의 등장

by 김태라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 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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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이었다.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화장실 사용을 거부받았다. 카페 주인은 퉁명한 얼굴로 카페 문의 문구를 보라고 했다. ‘화장실은 고객만 사용 가능’이라고 적혀있었다. 얼음을 돈 받고 파는 곳도 있었다. 돈 냄새가 진하게 나는 게 산티아고가 가까워지긴 했나 보다.

오늘 순례길엔 교통 체증도 있었다. 수학여행을 온 학생무리와 함께 걷게 되었는데 10대들 답게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걷거나 과한 몸장난을 치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중에 지도 선생님과 대화를 해보니 500명이나 되는 인원이라고 했다.


길을 막고 있는 10대 사이를 능숙하게 추월하며 걷고 있는 순례자가 보였다. 나도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걷고 있던 이 순례자는 2개월째 걷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전에도 순례길을 여러 번 완주 있다고 했다. 시작은 영양제였다. 오래 걸으니 피곤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근육통이 없는 비결이라며 영양제 하나를 추천했다. 그리고 내가 등산스틱 잡는 법이 잘못되었다며 제대로 잡는 법을 보여주겠다고 내 손에서 등산스틱을 가져가 시범을 보이더니, 가방 메는 법, 내가 있는 착장 하나하나를 지적하며 자신이 걸으며 터득한 잘 걷는 방법을 전수해주려 했다. 그리고 내가 자신을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했다.

내가 반응 없이 조용히 걸으니 그는 나의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했다. 다른 순례자들과의 만남을 묘사할 땐 ‘제쳤다.’는 표현을 쓰며 자신이 남들보다 얼마나 ‘잘’ 걷는지를 과시했다. 이어서 나에게 정말 ‘잘’ 걷는다고 했다. 칭찬이었지만 기분이 좋진 않았다. 확실히 그는 순례길을 걷는 데에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고 걷기 숙련자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내가 얼마나 잘 걸어왔고, 뭘 놓쳤는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나는 그렇게 걷지 않는다. 나에겐 지금이 가장 편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순례길 끝무렵에 다가온 이 만남에 마치 지금까지의 나의 길을 평가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를 그냥 그런 사람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순례길을 여러 번 걸으며 그가 얻은 확신에 찬 ‘정답’의 출처가 궁금해서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방식이 너무나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익숙하게 노출되어 왔던 언어들과 닮아있었다, 정인 양 사랑인양 상대방을 평가, 지적, 부정하는 말들. 오랜만에 들으니 그 본질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평가자의 등장

D+84 프리미티보길 14일 차

루트 :Melide-O Pedrouzo(약 34km)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알람 없이 눈이 떠질 때 일어났다. 뻐근한 목을 비틀어 방 전체를 바라보았다. 비어있는 열 두 개의 침대가 보였다. 안개가 낀 창이 활짝 열려 있어 아침 공기가 시원했다. 뿌연 안개를 한참 바라보았다. 마지막 날이다. 오늘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걸어 냈다는 기쁨과 끝이라는 슬픔, 형언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올라왔다.

오늘이 함께 하는 마지막 아침이 될 수 있으니 조식을 같이 먹기로 했다. 이상한 기분을 안고 친구들이 있는 카페로 갔다. 다들 복잡 미묘한 얼굴들을 하고선 힘 없이 인사했다. 한 친구도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고 했다. 대체로 슬프다고 했다.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포르투갈길 마지막 날엔 혼자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외롭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는 친구들과 함께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친구들을 열심히 따라 걸었다. 그런데 지난 며칠간 이 길을 어떻게 끝내고 싶은가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마지막까지 나답게 걸어내자.’


나답게 걷는 게 무엇일까. 남들보다 느리게 걷는 것? 아파도 무식하게 걷는 것? 걷다가 낮잠 자는 것? 아직 나답게 걷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떠한 현상적 의미는 아닌 것 같았다. 매일 아침 내 몸과 마음을 들여다보려 노력하고, 그 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는 것. 그게 가장 나다운 걸음이지 않을까 싶었다.

아침을 먹고 친구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친구들 처음 만난 날들이 떠올랐다. 오늘날 우리의 인연에 정말 감사했다. 걸음 속도를 조금씩 줄여 함께 걷던 친구들을 먼저 보냈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풍경을 바라봤다.

오늘도 순례길은 수학여행 온 학생들의 무리로 가득했지만 숲은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했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걸음에 따라 조금씩 변하는 냄새를 느꼈다. 아직도 이름을 잘 모르겠는 숲 속의 여러 새소리에 집중했다. 아,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쉬운 마음에 괜히 눈에 보이는 카페에 다 들렀다.

막상 산티아고 도심에 들어서니 신이 났다. 와. 진짜 해냈네. 나 자신 대견해! 지난 며칠 동안 마지막이 다가옴을 느끼며 꽤나 감정적이 되었기에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눈물이라도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도착하니 뭔가 그냥 ‘아 왔다.’의 느낌만 들었다.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에 앉아 한참을 대성당을 바라보며 순간을 마음에 담았다.

아마 아직 더 걸어야 할 길이 남아서일수도 있다. 순례길 4일 차에 하루의 해가 죽으러 가는 곳, 세상의 끝 피니스테레에 대해 들은 후 나의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그곳이었다.



두 번째 산티아고순례길 완주, 기쁨과 슬픔 중간 어딘가

D+85 프리미티보길 15일 차

루트 :O Pedrouzo-Santiago de Compostela(약 2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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