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87 가자, 세상의 끝 Fisterra로

by 김태라


어제는 산티아고에서 여름의 시작이자 산후안의 축일을 축하하는 큰 축제가 있었기에 하루 쉬어갔다. 축제에서 우연히 피니스테레까지 걷는다는 친구들을 만나 함께 걷기로 했다. 그런데 몇 시에 어디에서 만나자는 약속하는 것을 까먹었다.

일단 호스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앉아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여 앉아 함께 산티아고 멍을 때렸다. 호기롭게 90킬로미터를 이틀 컷으로 걷겠다던 친구는 지난밤 과음을 했는지 보이질 않았다. 다들 산티아고를 떠나는 것이 아쉬웠는지 한참을 아무 말없이 앉아있었다. 한 친구가 정적을 깨고 말을 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내 순례길은 산티아고에서 끝났음을 느꼈어. 그래서 나는 버스를 타고 피스테라로 갈 거야.”

다른 순례자들도 느낌이 비슷했는지 다들 버스를 타고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나도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 아직 내 순례길은 끝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홀로 대성당 광장을 떠났다. 무작정 걷기를 시작한 후에야 피스테라가 어느 방향인지도 모르고, 지도를 포함해 어떤 정보도 없고, 하물며 선불 유심카드의 요금제가 끝나 휴대폰에 인터넷도 없어 노답 상태임을 깨달았다. ‘세상의 끝’, ‘해가 죽으러 가는 곳’이라는 낭만적인 단어에 빠져선 정보도 없이 걷기부터 시작했다.

발걸음을 돌려 순례자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서 지도와 새로운 순례자 여권을 주었다. 알고 보니 이 길도 ‘피니스테레로 가는 길’이라는 정식 명칭이 있는 순례길 중 하나였다. 지도가 허접해서 중간에 길을 잃을까 걱정되었지만 카미노 엔젤들을 믿고 일단 걷기를 시작했다. 다행히 도시 끝무렵에 화살표가 있는 비석이 나왔다.

피스테라까지 가는 길, 약 90킬로미터, 다시 한번 순례길의 시작이다.




가자, 세상의 끝 Fisterra로

D+87 피니스테레길 1일 차

루트 :SantiagodeCompostela-Negreira(약 23km)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내 등산스틱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착각해서 실수로 가져간 것이라면 남은 것이 있어야 하겠지만 등산스틱 보관함은 텅 비어있었다. 순례길에서 도난을 당한 것도 충격이지만, 등산스틱이 없으면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었기에 더 충격이었다. 알베르게 주인이 누군가가 놓고 간 고장 난 등산스틱 두 개를 주었다. 하나는 펴지지가 않았고 하나는 스프링이 나가있었다. 아쉽지만 그거라도 챙겨 마을을 떠났다.

등산스틱을 잃고 나니 내 몸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반 밖에 펴지지 않은 등산스틱이라도 짚지 않으면 발걸음을 내딛을 수 없이 아팠다. 걷는 내내 등산스틱을 가져간 사람을 저주했다. 제대로 걸을 수 없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려 했지만 지나가는 차도, 잡히는 차도 없었다. 5킬로미터쯤 걸었을 때 카페가 보여 바로 들어갔다.

카페에 있던 순례자들이 택시를 타라고 권유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히치하이킹은 순례 방법의 일부 같아도 택시는 아닌 것 같았다. 오늘은 걷는 내내 나의 무식함 때문에 괴로웠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데 내가 걷기로 한 길이기에 아파도 끝까지 걸어내려는 무식함. 이럴 땐 내가 로봇 같다. 큰 생각 없이 결정한 것도 한번 한다고 입력된 것은 포기하지 못하고, 참 고집스럽다.

다시 길에 나서려 일어났는데 카페에 있던 한 순례자가 바지 안에 똥을 가득 담고 걷는 듯한 내 걸음걸이를 보더니 자신보다 나에게 더 필요해 보인다고 하며 자신의 등산스틱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도착한 마을에서 돌려줘도 된다고 했다. 너무 필요했기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정말 고마웠다.

어쩌다 보니 이 순례자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는 등산스틱 하나로 날아다니는 나의 걸음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도 내가 얼마나 등산스틱에 의지해서 걷고 있었는지 깨달으며 깜짝 놀랐다. 꽤나 수다스럽고 유쾌한 아일랜드 순례자 덕분에 별문제 없이 20킬로미터를 훌쩍 넘게 더 걸어낼 수 있었다.

그는 40대가 넘어서 결혼을 하여 40대 중반에 첫 번째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이제는 10살이 된 아들과 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30대 중반을 회상하며 불안했던 시기라고 기억했다. 그리고 같은 여성으로서 내가 가진 불안들에 많은 공감을 표했다. 그는 나이 듦에 따라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매일이 살아온 날 중 가장 편하고 즐겁다고 말했다. 정말 즐거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는 그의 해맑은 표정을 보며 나도 어서 그의 나이가 되고 싶었다. 그는 삶을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순례길을 대하는 태도 또한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늦어 해가 져오고 있었지만 그는 미리 사서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걷는 내내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 시간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운인지를 이야기하며 걸었다.




등산스틱 도둑 네 이놈!!!

D+88 피니스테레길 2일 차

루트 :Negreira-Lago(약 28km)






떠나기 전 하루는 온전히 쉬는 날을 가지고 싶었기에 오늘은 꼭 피스테라에 도착하고 싶었다. 오늘은 가능하면 히치하이킹을 해서라도 피스테라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길은 계획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히치하이킹에 실패하기도 했고 차가 없는 긴 숲길을 10킬로미터 넘게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다리는 아프고, 덥고, 배도 고프고, 마지막 날까지 참 힘들다 싶었다. 내 몸도 끝이 다가옴을 느끼는지 유난히 고통이 심했다. ‘끝까지 이러기야?’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그냥 버스를 타고 갈 걸 그랬나 생각도 했지만 무식하게 계속 걸었다.

유튜브의 힘이 필요했다. 심카드의 약정이 끝난 탓에 인터넷 연결이 없어 오프라인 재생목록에 저장해 둔 플레이리스트를 틀었다. 나의 컨디션에 전혀 맞지 않는 신나는 노래가 끝나고 재생된 목소리가 힘듦을 버티고 걷던 나의 길을 분위기를 바꾸었다. 배우 김혜자 님의 백상예술대상 수상소감 영상이었다. 김혜자 님의 따듯한 목소리와 문장 하나하나가 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의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비록 지금은 고통 속에 걷고 있지만 오늘 내가 가진 이 하루가 얼마나 값진 시간인가. 지난 여정이 얼마나 고되고도 아름다웠나.

순례길 초기에는 순례길이 끝날 때쯤 바뀐 내 모습을 상상했었다. 바뀌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나는 바뀐 것이 없다. 그리고 그게 참 마음에 들었다. 지금의 나는 그대로이지만 나의 내면엔 과거와 미래에 대한 후회나 허상보다는 현재의 나에게 많이 집중되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현재의 고통을 느끼고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각되었다. 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이 순간 나의 순례길이 끝났음을 느꼈다.


Km. 0.000


드디어 도착했다. 최후의 땅, 하루의 해가 매일 죽으러 오는 곳, 피니스테레(Finisterre). 표지석 옆에서니 동서남북으로 시원하게 대서양이 펼쳐졌다. 세상의 끝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절경이었다. 내가 표지석으로 가깝게 걸어가자 박수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향해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당황해서 내 뒤에 누가 있나 살폈지만 나를 향한 것이 맞았다. 무슨 의미인진 몰라도 등산스틱을 들어 보이며 크게 포효했다. 박수는 번져 더 많은 이들이 환호했다. 어떤 사람들은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내가 도착한 곳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 저세상인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역시 모르는 얼굴들 뿐이었다. 몇 사람들과 사진을 찍은 후에야 이곳에 꾀죄죄한 몰골로 배낭을 메고 있는 사람이 나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언덕 아래 마을에 있는 호텔에 체크인하고 깨끗하게 씻은 후 이곳에 올랐던 것이다. 그들의 박수는 굳이 이 긴 언덕 10 킬로그램의 배낭을 지고 오른 한 무식한 순례자에게 보내는 것이었던 것 같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시작해 포르투갈길, 북쪽길, 프리미티보길 그리고 피니스테길까지, 89일 동안 1,538킬로미터를 걸었다. 길었던 기간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 가슴이 벅차오를 줄 알았다. 조금은 더 극적일 것이라 상상했던 내 순례길의 마지막은 꽤 고요했다. 세상의 끝에서 오늘의 해가 화려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약 90일의 여정, 순례길 마지막 날

D+89 피니스테레 3일 차

루트 : Lago-Fisterra (히치하이킹 제외 약 2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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