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0 운동화 화형식

by 김태라

어젯밤, 밤이 깜깜해질 때까지 피니스테레 절벽 앉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눴다. 긴 언덕을 내려오자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친구들은 이미 체크인한 숙소가 있고 나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 곳이 없지만 왠지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순례길이 끝나긴 순례자로서의 긴장감도 풀렸나 보다. 그러다 다른 한 친구가 바닷가에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순례길의 마지막 날 밤으로 바다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알베르게였다. 바닷가에 가니 모르는 얼굴의 친구들이 많았다. 프랑스길, 은의 길 등 다른 길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이곳에 도착한 순례자들과 함께 수많은 별 아래에서 함께 잠에 들었다.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밤, 오늘도 바다에서 보내기로 하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다에서 수영을 한 후 걷다가 마주치는 이와 밥을 먹고, 마주치는 이와 낮잠을 잤다. 순례자라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너무 편안하고 익숙했다. 해가 질 때쯤 장작거리를 주워 바다에 돌아갔다.

떠나기 전 꼭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다. 세상의 끝에서 다다른 순례자들이 신발을 태우는 의식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된 이야기인지 신발을 태운다는 순례자는 찾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이 의식이 꼭 하고 싶었다. 지난 90일 동안 배낭의 무게를 견디느라 신발에는 구멍이 가득했다. 지난 90일 동안 내가 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견뎌내 준 운동화였다. 그 무게를 이곳에서 보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 혼자라도 이 의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신발 화형식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순례자들이 손수건, 양말 등 자신에게 의미 있는 물건들을 가지고 모였다.

깜깜한 밤이 되자 바다의 한편에 순례자들이 둘러모였다. 각자의 순례길을 장작 위에 올렸다. 타기에 좋은 작은 것들부터 불이 붙기 시작했다. 불이 번져가며 신발에 가장 마지막에 불이 붙었다. 운동화가 타들어가자 약속이라도 한 듯 순례자들이 조용해졌다.

까만 재가 되어가는 운동화를 보고 있자니 마치 나 자신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순례길을 오기 전 나의 마음, 순례길에 오른 후 마주한 우연, 기쁨, 슬픔, 불안, 분노까지 내가 지난 90일 동안 살아온 모든 시간이 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 존재가 분리되어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무한한 평온함이 느껴졌다.

정말 힘들었다. 정말 괴로웠다. 정말 행복했다. 정말 재밌었다. 정말이지 걸어내길 잘했다. 시간아, 정말 고마웠다.

다른 순례자들의 표정들을 보니 아마 그들도 그들만의 작별인사를 하는 중인 것 같았다. 우리는 운동화가 모두 타 들어갈 때까지 끝까지 함께 했다.



운동화 화형식

D+90 세상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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