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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라 Nov 10. 2024

입전수수의 의미: 구세주 콤플렉스를 넘어서

동굴 밖의 진리를 깨달은 자는 동굴로 돌아가 진리를 전해야 하는가

출간을 앞둔 십우도 소설 ‘작가의 말’ 원고를 출판사에 보낸 뒤, 내가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통해 글을 쓰고 있는 이유가 명료해져 이를 기록한다. SNS도 하지 않는 내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 공짜 글을 1년 넘게 발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이곳에 올라와 있는 글은 얼마 안 되지만 에세이에 해당하는 백 편 넘는 글이 본 계정 ‘서랍’ 속에 들어가 있다. 발행한 뒤 그대로 남겨둔 것보다 며칠 뒤 없애버린 경우가 더 많은 것인데, 그 이유는 또 무엇인가? 근간작 ‘작가의 말’을 쓰면서 그것이 저절로 해명됐는데, 이는 이 글 부제에 함축된 ‘진리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동굴 밖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동굴로 돌아가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전해야 하는가?

내가 출강 중인 대학 중간고사에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와 연관해 출제한 문제이다. 철학 과목 특성상 정답은 없고, 자기 생각을 전개하는 과정에 주안점을 둔다.


이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다수의 생각과 다른 것을 얘기했을 때 이를 수용하는 사람이 적거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드물지만 전체의 발전을 위해 깨달음을 공유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가진 한 학생이 물었다. 교수님의 의견은 어떠한가? 이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진리는 지식이나 정보와 달리 표현하는 것까지가 진리다.


이를 불교 십우도 도해에 비추면 ‘입전수수(入廛垂手)’가 된다. ‘저잣거리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로 직역되는 이 최종 단계의 목적은 (흔히 오해되는 것처럼) 타인이나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입전수수 전 단계인 반본환원(返本還源)은 본래 자성이 드러나 내외가 충만한 상태이다. 따라서 반본환원에서 입전수수로의 전환은 중생을 교화하거나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심리에 근거할 수가 없다.


의식이 깨어나는 과정에서 넘어서야 하는 결정적 장애가 바로 ‘구세주 콤플렉스’이다. 이 정의(正義)로 무장한 마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면 도판의 약장수나 사이비 교주가 되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바꾸고 고친단 말인가? 내가 깼다 해서 남을 바꿀 필요도 없고, 남을 위해 내가 바뀔 필요도 없다.


깨달음 혹은 진리는 자체로 충만하여 흘러넘치는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다. 그 에너지가 형상의 세계에 흘러들어(入廛) 모습을 드러내면(垂手) 작품이 된다. 특히 이야기로 표현된 작품은 사상서나 교과서처럼 직설화법을 쓰는 대신 비유나 상징을 통해 발언한다. 작품은 그저 세상에 손을 내밀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 손을 잡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표현으로 완성되는 진리는 소유물의 개념이 아니다. 내 안의 것이 외적으로 구현되면 그것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과 분리되며 창작을 통해 내면이 비워진다. 그 ‘비워진’ 상태가 바로 진리다. 진리란 역설적으로 진리와 분리된, 진리를 비워낸 상태인 것이다. 그 비움의 크기만큼 자기의 본래면목이 드러난다. 따라서 깨달음의 본질은 타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데 있다. 자신이 된 존재는 그 존재 자체로 타인 속의 그 자신을 깨게 된다.


나의 모든 창작은 이러한 ‘진리’ 작업에 속한다. 그래서 쓰고 비우고 버린다. 2024년 결실의 계절, 또 하나의 진리가 열매를 맺게 되었다.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으며 책의 무게만큼 가벼워지고 또 비워졌다. 그리고 비워진 만큼 나 자신이 되었다. 깨달음은 창작처럼 부단한 과정이다. 또한 그 과정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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