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라 Nov 18. 2024

창작인문 6강: 사랑의 소외와 욕망의 소외

소설창작인문학교 11주차(2024. 11. 19)

사랑은 곧 소외이다. 여기서의 소외는 기존의 피동적 의미와 달리, 자아를 스스로 버린다(뛰어넘는다)는 뜻이다. “자신을 내던지지 않고서는 사랑할 수 없다”는 L. 포이에르바하에 의하면, 사랑이란 “성냥개비처럼 메마른 자아를 사랑의 불길에 태워 단순한 자기 존재를 포기하고 사랑 속에 새로운 존재 근거를 정립하는 일이다.”


C. 융의 자아(ego)와 자기(Self) 구분에 비추어 보면, 사랑은 ‘자기’를 향하는 의식이다. 사랑의 대상은 자신인 동시에 자신보다 높은 존재, 즉 자기의 전체상과 같다. 이는 자신과 대립되거나 반대되는 대상이 아니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 두 사람이 ‘반대되는 성향 때문에 끌렸다’ 하는 경우가 많은데, 육적 관계를 맺을 때는 서로 반대되는, 즉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는 성향에 끌리게 된다. 욕망과 결합된 카르마의 작용인데 이렇게 맺어진 관계는 번식을 통해 카르마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게 된다.


포이에르바하나 융이 말하는 사랑은 이러한 육적 관계가 아니라 정신적 관계를 뜻한다. 융의 이론에서 자기(Self)는 “우리 안의 신(God within us)”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신과 같으면서 그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이다. 한마디로 사랑의 대상은 자신의 상위 자아, 신 자체인 것이다. 신은 남성이자 여성이기에 자기와의 통합은 곧 내면의 양성통합 과정이기도 하다.


이렇게 인간은 자기와 통합될수록 결핍이 사라지고, 결핍이 사라지면서 필요한 것이 줄어들고, 외부에서 필요한 것이 없어지면서 자기충족적인 존재가 된다. 충족의 근원(신)과 하나 되는 이 과정을 자기실현, 깨달음, 의식성장 등으로 부르는데, 이러한 ‘큰 것’에의 헌신에는 ‘작은 것’의 포기가 따른다. 동서고금의 선각들이 “강한 힘을 위해 약한 힘을 포기하라”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큰 것에 헌신할 때 인간은 작은 존재성을 뛰어넘게 된다. 따라서 사랑이란 적극적인 자기소외인 것이다.


자기 존재를 그 속으로 던지려면 사랑의 대상은 기존의 자신보다 큰 존재여야 한다. 사랑의 진실성은 “상대의 크기가 나의 전체적 존재를 수용하고 포함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면서 포이에르바하는 또 이렇게 말한다.


“명예욕, 금전욕 등은 어리석은 욕망이다. 이 경우 인간이 자신을 바치는 대상은 그를 품을 수 없는 대상이다. 인간 존재는 그러한 유한한 것 안에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무한하고 거대하다. 수전노는 돈 속에 있는 동시에 돈 밖에도 있고, 돈에 의존적인 동시에 돈으로부터 독립적이다. 그는 헌신할 수 없는 대상에 자기를 내준다. 그리하여 완전히 헌신할 수도, 만족될 수도 없는 그 존재는 항상 도로 튕겨 나와 제자리로 돌려진다. 때문에 그에게 깃드는 것은 풍요 속의 빈곤, 만족 속의 공허와 같은 소름 끼치는 모순이다.”


수전노의 돈에 대한 관심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다. 욕망의 대상은 언제나 물질, 권력, 성적 대상 등 외부의 것인데, 외부 에너지로 자신을 채울수록 자생 에너지의 통로가 막힌다. 그렇게 되면 에너지 자급자족이 어렵게 되어 스스로 서는(自立) 능력이 퇴화된다. 그래서 ‘목발’이 필요해지는데, 이에 무지한 인간은 자립 능력을 기르는 대신 목발을 소유하는 데 생을 바친다. 바로 그 목발 때문에 본래 가지고 있던 자립 능력을 상실한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인간 만사의 동기는 ‘사랑’ 아니면 ‘욕망’에 있다. 호킨스 식으로 말하면 ‘Power’ 아니면 ‘Force’, 매슬로우 용어로 말하면 ‘성장욕구’ 아니면 ‘결핍욕구’, 융의 이론에 따르면 ‘자기실현’ 아니면 ‘자아강화’가 된다. 사랑은 자기(Self)를 실현하고 욕망은 자아(ego)를 강화한다. 사랑의 소외를 통해서는 자신의 비본질적 부분인 자아를 소외시키고(던져버리고; aufgeben) 자기의 본성과 통합된다. 반대로 욕망 속에서는 자기 본성이 소외되고(낯설어지고; entfremden) 자아가 보존된다.


사랑의 소외를 거부할 때, 인간은 욕망에 따라 소외된다. 전자는 본질적이고 적극적인 소외이고, 후자는 비본질적이고 피동적인 소외이다. 사랑의 소외냐 욕망의 소외냐, 즉 소외 ‘하느냐’ 소외 ‘되느냐’의 선택을 인간은 해야 한다. 또한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선택에 따라 살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