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단편소설
그에게 말하며 민서는 깨달았다. 어떻게든 계약을 성사하기 위해 마음을 썼던 열정이 저항 없이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금을 끌어오기 위해 애쓰며 모니터 앞에서 숫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을 때도 창밖으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꽃이 핀다는 것을.
하루토 상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상세하게 설명하지 못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곳에서 산책은 특별한 느낌이었어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하루토 상은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저는 이 집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묘지 사이로 난 길을 산책해요. 그리고 대답해 줄 사람이 없는 질문을 해요. 아내는 왜 내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길을 잃었던 아내가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까? 추측대로 아내를 잃은 경험으로 인해 조난구조기기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그가 다시 말했다.
“아내가 죽은 지 이 년이 되었어요. 그동안 한국어 교실 선생님도 만나보고 한국인들이 모여 살았던 미카와시마역 근방 시장도 다녔어요. 아, 그곳에 인천상회가 있어요. 거기 가면 한국식 김밥을 사 먹어요.”
“아내가 한국인이셨나요?”
“그걸 잘 모르겠어요.”
이상한 대답이다. 그의 표정이 허망해 보였다. 아내가 죽고 유품을 정리했다. 옷이며 핸드백 등을 정리할 때도 그저 먼저 간 아내가 야속했을 뿐이다. 살면서 크게 어긋난 적이 없었고, 혼자 남으니 여러모로 쓸쓸했다. 어느 날 주방에서 쌀을 씻다가 아내의 요리 메모가 떠올랐다고 했다.
“요리 메모요?”
“젊어서 주말부부로 이 년 정도 지냈어요. 그때 집에 다녀갈 때면 아내가 만든 몇 가지 반찬과 함께 메모를 해준 간략한 요리 방법이에요. 제가 근무하던 곳에 식당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걸 찾았어요.”
하루토 상이 가방에서 꺼낸 것은 빛바랜 편지 봉투다. 그가 봉투를 민서 앞에 놓아 주려는데,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고춧가루로 양념한 깍두기, 나물볶음, 두부부침, 된장찌개와 불고기, 흰쌀밥이 개인 쟁반에 담겨 있었다. 흰 앞치마를 두른 젊은 여자가 쟁반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맛있게 드세요,라고 한국어로 말한 후 트레이를 밀고 갔다. 그는 맛이 괜찮을 거라면서 수저를 들었다. 집된장 맛이 나는 찌개와 뜨거운 철판에 담긴 불고기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밥을 먹으며 그가 말했다.
“연애편지예요.”
“네?”
민서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좀 전에 보여 준 편지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되지만,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여서 자신이 이 자리에 온 이유를 다시 환기하며 밥을 먹었다. 흰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다가와 빈 그릇을 치워도 될지 묻고 따뜻한 차를 내왔다. 노인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 편지를 쓴 날짜가 1930년이에요. 그게 연애편지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 좀 시간이 걸렸어요. 제가 한국어를 모르거든요. 주변에 한국인 2세나 3세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한국어를 알 만한 지인이 있다고 해도 선뜻 이 편지를 보여 주지 못했어요.”
“그래도 이젠 내용을 알고 계신 거죠?”
“알아요. 번역기로 변환해 보니 연애편지더군요. 아내는 저보다 네 살이 많은 1950년생이니까, 아내의 연애편지가 아닌 것은 확실해요. 편지 봉투를 보면 한국에서 일본으로 보낸 거였어요. 사는 동안 아내는 한국에 대해 말한 적이 없어요. 일찍 부모를 잃고 양부모에게서 컸다는 얘기만 들었거든요. 아내가 그 편지를 왜 가지고 있었을까? 무슨 관련이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아내를 애도하는 시간보다 아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찾아가는 시간이 더 길었어요.”
민서는 오래된 연애편지와 하루토 상의 아내가 진심으로 궁금했다.
“해답을 찾으셨어요?”
“연결 고리가 별로 없어요. 문득 아내가 길을 잃었을 때 이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던 게 떠올랐어요. 식당에 다시 와서 물어보니 아내가 처음 이곳에 온 것은 무척 오래전이었더군요. 모친이 운영할 때부터였다고 해요. 지금 사장은 아는 것이 없었어요. 모친이 알고 계실지 모르겠으나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해요. 아내도 어쩌면 평생 자신이 누구인지 찾아다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더라도 왜 내게 말해 주지 않았을까? 어느 때든 말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을까? 도대체 내가 누구와 살았던 걸까? 우린 서로의 그저 관객처럼 살았던 걸까? 허망했죠.”
그의 아내 못지않게 앞에 앉아 있는 하루토 상의 처지가 궁금했다. 혼자 남는다는 것, 지금까지 안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이 그렇게 가볍고 가벼운 편지 한 장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건 어떤 걸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