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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탠 Jun 10. 2024

최저사랑제

세상에 사랑이 가득해서,
모든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1인분의 사랑은
모두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어.


친구 H양이 던진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며 살고 싶으냐는 질문에, 세상에 사랑을 더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대답을 했다. 어떤 말은 마치 예언처럼, 다짐처럼, 오래도록 찾아온 질문에 대한 답처럼 찾아와 내 안에 자리하게 된다.




 전 애인과 난 종종 쓰잘데기 없는 질문들을 주고받곤 했는데, 그중 하나가 '내가 정자상태로 돌아갔다고 쳐봐. 바로 앞에 난자가 있어. 이거 들어가 말아?'였다.


당시 내 대답은 NO 였다. 삶은 고해(苦海). 살면서 느끼는 기쁨도 물론 많지만, 기본적으로 삶은 괴로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거냐? 하면 그건 또 전혀 아니었다. 내가 없어지면 슬퍼할 사람들이 너무 눈에 밟혀서 였다. 그치만 이런 소중한 관계가 형성되기 전이라면, 굳이 태어나는 걸 선택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당시 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 애인의 대답은 YES 였다. 그 이유가 더 놀라웠는데, 본인이 더 이상 무언가를 느끼고 사유할 수 없게 된다는 것 자체, 부재(不在) 자체가 두렵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 자체가 선물이지! 태어난 덕에 좋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어서 너무 좋아!' 류의 답변까지는 예상할 수 있었지만 부재가 두렵다니! 실존에 대해 느껴지는 감사와 열망에 화들짝 놀랜 후로 나는 어디 술자리만 가면 동일한 질문을 했더랬다. (여러모로 맨 정신보단 술기운에 묻고 답하기 좋은 주제였다.)


 답은 제작기 달랐다. 놀라운 점은 삶이 주어진 것 자체를 긍정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아니 난 내가 긍정왕인줄 알았는데 부정왕이었다고?

주변에서도 긍정적인 친구로 불리던 나였기에, 내가 삶을 남들보다 힘겨운 것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에 꽤나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스스로의 답이 가장 두려웠던 건, 내가 지나치게 관계지향적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크고 작은 배반을 겪기 마련이다. 상대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관계라는 건 기대를 품고 자라나기에, 배반은 필연이자 숙명이다. 어떠한 배반은 아주 미약하여 알아차리기도 전에 회복되나, 어떠한 배반은 죽을 때까지 안고 갈 흉을 남긴다. 지금까진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 살면서 삶의 근간을 뒤흔드는 배반을 만났을 때 내가 삶을 저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삶의 중심은 본인에게 있어야 하는 거 같은데, 이거 아무리 봐도 건강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이 어떠한 질문을 품고 있을 땐, 마주하는 모든 것들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한다. 사람과의 대화, 텍스트, 영화, 드라마, 음악 그 모든 것들에 계속 묻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각종 모임에서 인생 책, 영화, 미술품 등을 물을 때면 사람들은 그 당시의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과 그 작품이 본인에게 준 답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내가 1년 가까이 품고 있던 질문은 '자기 앞의 생'과 '긴긴밤'을 통해 응답받았다.


 두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녹록지 않은 삶을 산다. 어떻게 생이 이다지도 잔인한가. 읽는 내내 마음이 무너져 몇 번이고 책을 뒤집어두고 숨을 크게 들이쉬어야 할 정도다. 그러나 두 작품은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며,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생은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생은 다른 누군가들과 나눠 들고 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생을 나눠가지고 있고, 내 생 역시 누군가가 나눠 들고 있기에, 생의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자 스스로가 틀렸고, 또한 틀리지 않았다는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건강하지 못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구나. 사람을 살게 하는 건 사람이고, 내 삶을 함께 나눠 가져 주는 이들의 사랑 덕분이며, 나 또한 기꺼이 나누어 들고 싶은 이들에 대한 사랑 덕분이구나. 그렇기에 생은 그 자체로 살 가치가 있다는 깨달음을 말이다.

이는 막연히 예정된 배반에 대해서도 용감해지게 했다. 내 삶을 나눠가진 조각의 크기는 모두 다르겠지만, 아무리 큰 조각을 가진 자에 의한 배반일지라도, 내 삶을 나누어 진 다른 이들이 단단히 지탱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온오프라인을 떠도는 각종 혐오들과 마음 아픈 사건들을 볼 때면, 세상에 사랑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사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의 절대 총량은 부족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의 부로 전 세계 사람을 살리는 데 부족함이 없음에도, 여전히 4초에 1명씩 굶어 죽는 것처럼, 사랑에도 쏠림현상이 심한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어쩌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거겠지.

그치만 설사 그렇더래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최저생계비가 주어지듯,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1인분의 사랑은 모두가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꿈을 꾼다.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 망상을 하면서, 세상에 사랑을 붓는 사람이 되길,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제 몫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사람이길 바라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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