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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TAE Apr 05. 2021

디지털 시대에서 아날로그의 매력

<아날로그의 반격>을 읽다.

최근에 아이패드를 중고로 구입했다. 아들이 아이패드 미니를 쓰고 있었는데, 좀 큰 화면이 필요한 것 같아 이래저래 알아봤다. 그러면서 아이패드 관련 액세서리를 찾다 보니 ‘종이질감 필름’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게 뭘까 싶었는데, 아이패드용 애플 펜슬을 쓰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이라더라. 일반적인 화면 보호 필름은 너무 매끄러워서 필기감이 좋지 않아, 적당히 마찰력으로 종이 질감이 나는 필름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기기의 대명사인 아이패드를 사용할 때 아날로그적인 종이의 느낌을 원한다는 것이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이질감 필름을 보면서 최근 읽은 이 책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데이비드 색스가 쓴 <아날로그의 반격 - 디지털, 그 바깥의 세계를 발견하다>이다.



LP와 아날로그 음악의 귀환


자신들의 부모 세대가 아이팟과 페이스북을 이용하기 시작하자 아이들도 뭔가 다른 것을 찾기 시작했어요. 부모가 사용하는 것들은 쿨하지 않으니까요.


이 책은 LP판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스트리밍이 대세인 시대에 LP가 왜?라는 의문이 들었다. 현재 미국 LP 시장의 주요 고객의 연령층은 10-20대라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음악을 스트리밍으로 들었던 그들에게 LP라는 아날로그 음악은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쿨한 것으로 받아진다. 음악이 가진 기술적인 면, 손으로 만져지는 느낌, 눈에 보이는 모습, 그리고 각각의 앨범마다 확연하게 다른 음질, LP는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LP를 턴테이블에 올리고 바늘이 내려가며 턴테이블이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마치 캠프파이어를 지켜보는 것과 같다고도 표현한다. 그런 이유로 LP 산업은 다시 부활하고 있다. 오래된 것이 다시 새로운 문화 트렌드로 돌아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학창 시절 꽤 오랫동안 CD를 모았었다.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신보가 나오면 설레는 마음으로 용돈을 들고 음반가게에 가곤 했다. CD를 구입해서 듣는 음악은 테이프보다 음질이 좋기도 했지만 또 다른 즐거움은 앨범 커버였다. 음악을 들으며 커버의 평론을 읽기도 하고, 작곡가나 연주자 이름을 보며 스타일과 특징에 집중하기도 했다. 앨범별 다양한 커버 디자인을 보는 것도, 커버의 재질과 디자인 스타일을 보는 것도 재미난 부분이었다. 하지만 스트리밍이 대세가 되면서 그렇게 모아둔 CD를 최근 10여 년간은 전혀 듣지 않았다. 집에 모아둘 공간이 부족해서 결국 듣지 않는 CD를 다 폐기했지만, 앨범 커버만큼은 잘 남겨두었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음악을 지금은 스트리밍으로 정리해서 듣고 있지만, 앨범커버를 보고 읽는 것은 여전히 즐거운 일이다. LP는 아니지만 음악을 부분적으로나마 아날로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서점과 종이책의 생존


이 책은 LP 외에도 여러 사례를 통해 아날로그가 되살아나는 사례를 다룬다. 디지털카메라와 핸드폰 카메라로 인해 거의 생산하지 않았는 카메라 필름을 다시 부활시킨 필름 제조업체 페라니아의 이야기, 보드게임, 종이책과 인쇄산업, 고객이 읽고 싶을 만한 책을 권하는 핸드 셀링을 하는 오프라인 서점의 이야기 등, 이미 사양산업 혹은 더 이상 찾지 않을 것 같은 분야가 되살아나는 현상에 대해서도 다룬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역시 서점이다.


둘러보기(Browsing)와 찾기(Searching)의 차이죠


이 한 문장으로 심플하게 요약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온라인 서점과 달리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우연한 기회를 통한 책을 만날 수 있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명확하게 찾고 싶은 키워드가 있지 않으면 책을 고르기가 어렵다. 웹페이지 메인에 추천 도서가 있긴 해도 그다지 흥미가 없는 경우가 많고, 어설프게 키워드로 책을 찾아 구입했다가 실망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서점에서는 그저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기만 해도 즐겁다. 물리적인 책의 촉감도 느낄 수 있고, 각종 신간의 느낌, 매대에 있는 책의 제목을 읽어보면 요즘의 트렌드와 관심사가 한눈에 보인다.


서점에 가보면 손님들이 제품을 쓰다듬고 손으로 비비고 들어서 무게를 재보는 등 책이라는 제품을 즐기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물리적 특성들을 경험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내용과는 무관한데도 우리는 만지게 된다. 우리는 상상력과 개념화 능력,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결국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게 오감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육체적 존재다.


처음 e북이 발행되고 각종 전자단말기가 출시되면서 종이책은 멸종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지만, 종이책은 여전히 살아있다. 종이책의 생존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책의 활자와 종이의 느낌을 사랑한다. 손으로 책을 만지면서 느낄 수 있는 사각사각 종이의 질감, 인쇄 잉크가 느껴지는 종이와 활자의 냄새, 그리고 서로 다른 종이에서 느껴지는 적당한 무게감과 차르륵 넘길 때 들려오는 종이 부딪히는 소리마저 사랑할 수밖에 없다. 책의 커버가 아름다워 소장하기도 하고, 서로 다른 크기의 책이 책장에 나름의 질서를 형성하며 꽂혀있는 모습을 지루하지 않게 바라본다. 이 모든 것들은 디지털 세계, e북으로는 느낄 수 없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감각이다.



포기할 수 없는 디지털의 편리함과 확장성


아날로그의 복귀는 재미난 현상이지만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디지털 세계의 음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내쉬빌에 형성된 아날로그 스타일의 레코딩 스튜디오에 대한 호의를 보인다. 편집이 너무나 쉬운 디지털 방식의 레코딩보다, 음악과 사운드가 가진 원래의 따뜻함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 방식의 레코딩을 옹호한다. 음악 제작 방식이 디지털화되면서 편집과 변형이 쉬워진 것은 분명 맞는 이야기이고, 그 때문에 악기와 보컬이 지닌 본래 소리의 색깔이 사라지거나, 제한된 녹음 시간을 통해 빚어지는 섬세한 호흡과 떨림에서 오는 감동이 적어질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아니었으면 내가 음원을 발행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많은 장비와 비용을 개인이 투입하여 만들긴 어렵다. 디지털이 가지는 확장성과 범용성, 그리고 현저하게 낮아진 가격 접근성은 많은 이들을 음악의 세계로 끌어들였고, 그래서 오히려 세상의 음악을 더 풍요롭게 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싶다. 좀 더 오랜 시간 음악을 하다 보면 아날로그 장비를 원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디지털 환경이 나 같은 개인도 음악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것이다. 지금의 어느 시대보다 개인이 음악 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아날로그 건설 산업에서 디지털의 가능성


건설은 아날로그의 대표적인 산업이다. 설계나 관리 기법 등은 여러 면에서 디지털화되었지만 철근을 엮고 콘크리트를 타설 하기 위해서는 장비의 반경과 펌프카의 용량의 한계를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거운 철골 부재를 양중하고 볼트를 체결하거나, 커튼월의 부재를 설치하기 위해 제한된 조건 하에서 장비와 사이클의 조합을 통해 최대 효율을 고민하는 것은 아날로그 산업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단위 공종에서도 아날로그이기 때문에 생산성의 한계가 있고, 산업 전반에서 성장 속도의 저하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그래서 건설의 생산성 향상은 디지털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물리적 한계가 있는 장비 효율의 향상이나 숙련공의 투입은 효과가 미미하지만, BIM 등 디지털화되어 사전에 도면 간 간섭을 제거하거나, 설계를 빠르게 반영하고 의사결정을 받는 등 아날로그 방식 외적인 측면에서 생산성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래서 건설은 앞으로도 한동안 지금의 방식을 유지할 것 같다. 디지털로 인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지만 건설에서는 물리적인 방식을 쓰지 않고는 업을 수행할 수가 없다. 많은 부분에서 일자리가 없어지고 인력이 축소되는 추세이지만, 건설에서 숙련된 엔지니어의 가치는 당분간 유지되지 않을까 싶다.


처음 건축공부를 시작하던 대학 초년생 시절, CAD를 강의하는 교수님이 추천했던 책이 니콜라스 네그로폰테의 <디지털이다(Being Digital)>였다. 0과 1로 이루어진 비트(Bit)의 본질과 디지털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던, 디지털 시대 초입의 고전 같은 책이었다. 20년이 지나 지금은 <아날로그의 반격(The Revenge of Analog)>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마치며


아날로그는 한계가 있고 불완전하다. AI시대의 인간처럼, 완전하지 못하고 결함이 많은 것이다. 디지털이 시작되던 시기에는 디지털로 인한 한계를 극복하고 무한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미덕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디지털의 무한한 자유보다는 아날로그의 제약을 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내가 속한 건설산업도 그런 제약이 미덕과 매력으로 여겨지는 날이 과연 올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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