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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Jul 18. 2017

얼떨결에 그렇게 되어버렸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10시 반쯤 독서실을 빠져나왔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축축한 공기지만, 선선한 느낌이 들어서 싫지만은 않았다. 습기를 머금은 길거리를 비추는 주황색 가로등이 아름다웠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빵집은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이어트 중에 밀가루를 먹으면 안 돼'라고 외치는 마음에 소리는 가뿐히 무시하고서 급하게 들어가 빵을 골랐다. 소보루 빵과 야채 크로켓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밤빵과 크로와상을 사 들고 나왔다. 5,300원이 나왔는데 마침 주머니에 삼백 원이 있어서 마치 실종자를 발견한 구조대원처럼 "삼백 원 있습니다!"라고 다급하게 외쳤다. 아주머니가 약간 당황한 듯해서 민망했지만, 빵집을 나오면서 느껴지는 소소한 뿌듯함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가방과 빵을 내려놓고 얼굴과 손을 씻었다. 다이소에서 이천 원을 주고 임시로 샀던 핸드워시가 다 떨어졌다고 하자 어머니가 "이것만은 안 팔려고 했는데..."라고 말하며 주섬주섬 보물을 꺼내는 골동품 상인이 지을법한 표정과 말투로 꺼내 주신 '비싼 핸드워시'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다이소 비누는 파리처럼 손을 하염없이 비벼도 거품이 안 나오는 주제에 물로 씻으면 어쩐지 비누가 남아있는 듯한 찝찝함마저 들었었는데, 확실히 비싼 핸드워시라 그런지 향도 훌륭하고 씻은 후에도 깔끔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어쩐지 좋은 일이 연달아 터지는걸?'


 냉장고에 쌓아둔 차가운 탄산수 한 병을 꺼내 얼굴에 비비며 방으로 들어오면서 생각했다. 핸드폰으로 잔잔한 노래를 틀고 창문을 열고 선풍기를 바짝 붙이고서 책상에 앉아 읽어오던 책을 읽었다. 얼마 남지 않았기에 오늘은 마무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금방 읽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글이 주는 여운이 강해서 몇 번이고 곱씹다 보니 예상보다 좀 더 오래 걸렸다.


'그리고 자작나무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만 남았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서 책을 덮었다. 노트북을 켜고 짧은 독후감을 작성했다. 아프기 시작한 이후로 책을 읽은 뒤의 느낌이라던지 독서 중 들었던 생각, 그 당시의 주변 환경들을 끄적거리곤 했다. 몇 년 전, 100권째를 돌파했을 때는 뿌듯한 마음이 들어서 페이스북에 은근슬쩍 자랑하는 글을 쓰기도 했는데(정말 재수 없는 스타일) 5년째 사용하던 노트북이 고장 나서 한순간 모든 독후감을 날려버린 후부터 어쩐지 허무하고 부질없게 느껴져서 마음이 내킬 때만 이따금 작성하고 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짧은 독후감을 작성한 뒤 78.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무라카미 하루키)라고 제목을 입력했다. 새삼, 어느덧 78번째 독후감이라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설렁설렁 마음 내킬 때만 쓴 것 같은데. 독후감들이 강 하류에 쌓여있는 모래둔덕처럼 어느샌가 은근슬쩍 자그마한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매일같이 조금씩, 약간은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하다 보면 얼떨결에 이루어져 있는 것들이 있다. 내 인생에서 그래도 약간이나마 무언가가 '일어났다'라고 말할 만한 것들의 대부분이 그랬다. 뭐랄까, "오늘부터 이 일을 시작할 것이고 이 업적을 끝내고 나면 나는 무언가가 되어있을 거야!"라고 거창하게 시작한 일은 적어도 나에게는 없다. 그저 반복하다 보니 우연찮게 이렇게 되어있었다.

하루하루 만나다 보니 사랑에도 빠졌고, 한 달 두 달 버티다 보니 암에서 살아남았고, 일 년 동안 글을 끄적이다 보니 책을 낼 기회도 생기게 됐다. 스스로도 돌아보고서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어느 날, 삶의 걸음을 잠시 늦추고 원래의 내가 있던 자리에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돌아볼 때면 깜짝 놀라곤 한다. 평범한 하루들의 반복에 휩쓸려 여기까지 흘러온 일들이 믿기지 않는다. '언제부터 이렇게 돼버린 거야?'라고 감탄하곤 한다. 역시나 약간 이뤘고, 많은 것을 잃었다.


'내가 나태했기 때문이겠지. 물론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겠지만... 난 그냥 변명의 여지없이 완벽하게 게을렀을 뿐이야.'라고 느꼈다.


 약간의 자괴감을 서둘러 정리하고 글을 마무리한 뒤 침대에 누워 잘 준비를 한다. 자고 일어나면 또다시 반복되는 평범한 하루에 섞여들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오늘 밤은 땅속에 잠들어있는 지렁이가 되는 꿈을 꾸었으면 한다. 좀만 더 쉬다 고민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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