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혈액암 환자의 인생 적응기
육체적인 고통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 내성이 생기지도 않는다. 엑스레이로 볼 수도 없고 의사가 약물로 치료해주지도 않으니까 혼자서 치료하는 수밖에.
병원에서 지내는 어느 날인가부터 주먹을 꼭 쥐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 얼마나 세게 쥐는지 아파서 잠을 깨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보라색으로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렇게 잠에서 깨는 날은 항상 식은땀을 흘렸다.
마치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많이들 흘끔거리기도 했는데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 같아서 불쾌했다. 항상 욕을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다. 그때부터 종종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는 했다. 내 안에는 성질 나쁜 악마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 앞에서 한심스러울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날 아련하게 쳐다보면서, 말을 걸 때는 쥐며느리처럼 몸을 구부리며 상황에 맞지 않는 존칭을 썼다. 세계를 위협하는 마왕한테도 이런 식으로 비굴하게 굽실거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남들에게 더욱 지랄 맞게 굴었다. 다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날 배려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그냥 신경 꺼주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인데.
매번 말하지만 나는 지랄 맞은 피해망상 환자이다.
하루는 병원에서 친구의 부축을 받으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도 무슨 검사를 받으러 가는 중이었는데 남들의 시선에 과민 반응하며 날카로워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는데 젊은 부부와 5살 정도의 귀여운 남자아이 그리고 눈 한쪽이 부어있는 환자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남자아이가 고개를 들고서 나를 바라보더니 똘망똘망하고 큰 목소리로, 옆에서 아이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저 아저씨는 왜 머리가 없어?”
순간 주변의 모두가 당황스러워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어머머머 얘 왜 이러니, 왜 이러니!”라며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했고 회색 롱 코트를 입고 있던 젊은 남편은 고개를 숙이며 연신 죄송하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 구석의 환자는 끔뻑거릴 수 있는 부어있지 않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어색하게 서 있었다.
“푸하하” 참을 수 없는 유쾌함에 소리 내어 웃었다. 발가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생각났다.
아이는 보이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다. 말속에 어떠한 의미도 조롱도 없다. 단순한 호기심으로만 가득 차있다.
어쩐지 그 후부터는 사람들이 흘끗거려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 아이는 하늘에서 나에게 보내준 천사 아니었을까.
요즘은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 전 하루 동안 어떤 기분 좋은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거의 집착하는 수준으로 생각해낸다.
아침에 마시는 커피에 우유를 알맞은 정도로 부었던 것, 지나가는 길에 계란빵 굽는 냄새가 좋았던 것, 햇살이 밝아서 눈이 부셨는데 때마침 나무 그늘이 나타난 것.
그러면 아무리 힘들었던 날도 그럭저럭 괜찮았던 하루가 되어버린다. 조금은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여전히 나는 똥물을 뒤집어쓰고 아등바등 세상을 뒹굴고 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 침대에 누워서는 괜찮은 인생을 살다가 간다고 생각하면서 삶을 끝내고 싶다.
몇 년 전 투병 중에 친구들과 여행을 다니며 찍었던 사진을 보았다. 저런 몰골로 참 해맑게도 돌아다녔구나 싶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사진처럼 지나가는 삶의 단편들이 보인다고 한다. 그 순간에 나는 무엇을 보게 될까?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나도 꽤 괜찮은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필름들을 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