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죽는다(2)

29살 혈액암 환자의 암 투병기.

by 김탱글통글

오늘은 새로 업데이트가 된 게임을 하기 위해서 이주 전부터 약속한 만남이다. 할 일 없는 백수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일정 중의 하나였기에, 친구의 어머님과 여동생이 여행으로 집을 비운 틈을 타서 하루를 묵어가면서 게임을 할 약속을 잡은 것이다.

친구는 잔뜩 추켜올린 어깨는 내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번쩍 들고 “여!”라고 외친 뒤 씩 웃었고, 나는 그런 익숙한 친구의 모습이 어쩐지 우스꽝스러워서 아하하 하고 웃었다.

영락없는 아저씨다.

가져온 짐을 풀어놓기 위해 오랜만에 친구의 집을 잠시 들렀다. 한두 번 정도 방문한 집이었는데 왜인지 모르게 익숙하고 반가운 마음이 드는 집이다.

이 집은 내가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집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달팽이관 형태의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게 되는 미로형 집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집 곳곳에 마치 산에서 돌 무더기를 쌓아 올려 기도를 드리는 간이 신단처럼 물건들이 쌓여 있었는데, 어떤 탑(?)들은 꽤나 아슬아슬하면서도 그 안에서 묘한 질서를 이루고 있어서 기도를 드리면 이루어질 것만 같은 경건함마저 풍기고 있었다.

돌무더기님 매일 저녁 치킨기름을 입에 묻히고 잠들 수 있게 되기를..

물건 위에 또 다른 물건이 올라가 있으면 간질을 일으키는 병이라도 걸린 것 같은 우리 집-정확히는 나의 아버지- 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이 집이 나는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방에 짐을 풀고 있으니 학진이가 오렌지주스를 내주면서 머쓱한 듯 말했다. “방을 좀 정리했어야 했는데 시간이 없었네..”

예의상으로도 괜찮다든지, 이 정도면 29살 남자의 방치곤 깨끗한 거라든지 같은 말은 할 수 없는 방 상태였기에 “그런데 정리를 하면 대체 어느 부분을 정리하는 거야?”라고 물어보았다.

친구는 “내가 잘 쓰는 물건은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곳에 보관하고 다른 것들은 딱히 어디에 있는지 신경을 안 쓰는 편이야”라고 대답했다.

나의 질문에서 약간의 비꼼이 느껴진 듯했는지 “내가 잘 쓰는 물건을 두는 곳은 나만의 룰이 있어서 이게 다르면 화가 나”라고 덧붙였다.

어지러움 속에서도 미묘한 자기만의 질서가 있는 것이다. 어렵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사람이 양배추나 원숭이의 기분을 알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집이 주는 알 수 없는 편안함 또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었기에 나는 그러려니 했다.

거실로 나와 친구의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탁자에 널브러져 있는 과자를 집어먹으며 말했다. “이 집에 몇 번 와본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익숙하고 좋은지 모르겠네”

“이 집이? 난 좁아터져서 지긋지긋한데”

“왜? 나는 나중에 돈 벌면 이런 집에서 살고 싶은데..”

“그럼 우리 옆집으로 이사 오면 되겠네”

“그러면 좋겠다. 이런 집에서 혼자 살면 딱 좋은데.”

말을 하고 나니 터무니없는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9살의 변변찮은 스펙의 남자가 혼자 살기에는 터무니없이 비싸고 사치스러운 집이었다.

병원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점은 내가 생활하는 모든 것이 다 돈이라는 점이다. 머물고 있는 병실부터 매일매일 찍어대는 흉부 엑스레이, 심지어는 귀가 가려워서 신청한 의료용 면봉까지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된다.

그래 다 가져가라!!

하루하루가 돈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내 주변 어른들을 비롯해서 친구들도 슬슬 일을 하고 있지만, 돈은 필요 없고 단지 취미로 일한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나는 아직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군대에서 제대할 당시에 치료비 환불 명목으로 나온 300만 원 정도가 내가 벌어들인 큰 수입 중 하나였다.

국군 수도병원에서 행정실의 중위에게 대단한 모욕감을 느끼고 나서 받은 그 돈은 나에게 불쾌한 기억뿐인 돈이었다.


중위는 내가 외박을 나가서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나갈 때마다 어떤 이유에서 인지는 몰라도 - 아마 내가 카투사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한다. - 상당히 비꼬는 듯한 말투로 나를 대했고, 매번 빠듯한 복귀 시간을 설정해서 수도병원으로 복귀하는 길을 항상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군대에 있는 동안 외부에서 받은 치료비를 환불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의를 하는 동안 그 중위는 노골적으로 나를 무시하는 말투로 “얼마 되지는 않겠지만..”을 말끝마다 입에 붙였다.

“네깟 놈이 상관할 문제는 아니란 말이다!”라고 말해주었어야 하는데 그 당시의 나는 군대의 상명하복 문화에 물들어 있는 23살의 애송이였다.

대한민국 육군은 썩었다.

사병들을 대하는 관문부터 썩었다는 것은 그 위로도 줄줄이 사탕 식으로 썩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사선 치료로 입안이 모두 헐어있는 나에게 반찬으로 김치와 멸치볶음을 주는 육군 때문에 주말에 어머니가 면회로 건네준 찹쌀떡으로 허기를 달래곤 했다.

눈물 젖은 찹쌀떡은 먹어봤습니다만..

부를 땐 나라의 아들 필요 없을 때는 뒤도 안 돌아보는 나라를 위해 헌신한 1년 반이었다. 그것 참 자랑스럽다.

방사선 치료를 끝마친 후 나는 재수없는 기분으로 점철된 그 돈을 계획 없이 사용했다. 비싼 소고기도 사 먹고 횟집에서 비싼 회를 사 먹기도 하고, 노트북을 사고 좋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이 그 돈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버려서 국가유공자가 되지 못 한 거라고 나를 꾸중하기도 하셨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받지 않았더라도 국가 유공자 같은 것이 쉽게 될 리는 없었을뿐더러,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드렸더라도 그 돈도 결국에는 어떤 식으로 사용됐을지는 지금 생각해보면 뻔한 결과였기에, 부모님에게는 미안하지만 나 자신에게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흥청망청 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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