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혈액암 환자의 인생 적응기
병원에서 지내다 보면 병원 밖의 사소한 일에도 무한한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처음 병실을 퇴원한 날에는 바깥에서 부는 선선한 바람이 너무나 기분 좋아서 나도 모르게 쇼생크 탈출의 앤디 듀프레인처럼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속으로 “프리덤!”을 외쳤었다.
집의 이불에 온몸을 휘감으면서는 하나님이 모두를 안아주지 못해서 인간에게 이불을 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병원의 이불은 어쩐지 차갑다.
매번 병실에서 탈출할 때마다 내가 이런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소소한 사람이란 것에 놀라고는 한다.
도로의 타일 사이에 피어있는 잡초에도, 하얀색 대리석 벽면에 비치는 햇살의 아름다움에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서, 마치 아이돌 가수를 만난 중학생 소녀처럼 꺅꺅 거리면서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고는 했다.
그래서 이런 감사함이 지속되는 며칠 동안은 항암치료로 망가져 버린 나의 얼굴을 거울로 바라보면서도 그래도 살아남아 있음에 감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봐도 대머리가 되어버린 항암 환자에게 이성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 같은 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특히 나와 같이 얼굴에 암이 걸려서 항암제를 얼굴에 정통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남자인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대화의 주제는 결국 여자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간다.
교회의 누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 같은 회사의 여자 대리가 벌써 나에게 푹 빠진 느낌인 것과 같은 시시하지만 항상 빠지지 않는 주제들 말이다.
나는 친구들이 모이면 하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사내놈들이 모여 앉아서, 알 수 없는 여자들의 마음을 자기 나름대로 확신하거나 추측하면서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 친구들이 아직 20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의 청춘에 내가 같이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된다.
하지만 암환자의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건 어쩐지 고통스럽다.
울렁거려서 얼굴을 돌리게 된다.
암환자나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 이를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는 경우들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느 정도 예외인 부분이고 특수한 경우이다.
다른 부분의 매력이 많은 것을 커버할 만큼 넘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휴 헤프너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다면 나이는 크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 스티븐 호킹은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지만 이를 크게 의아해하는 사람은 없다.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라면 가능하다.
돈과 재능 혹은 성격이라는 매력도 훌륭한 섹스어필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나는 매력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당신의 매력이 뭔가요”라고 물어본다면 몇 분 정도 망설인 뒤에 얼굴을 붉히고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말할 정도이다.
나는 나름대로 자존감이 낮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바닥나버린 자존감에 괜히 손해를 보는 느낌이다.
잘생긴 남자가 되는 것은 이번 생에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목표라면 매력 있는 남자라도 되자고 마음먹었었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다 귀찮아져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이대로도 편하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큰일이다. 매력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니.
유튜브에서 휘인이라는 걸그룹 멤버를 보았다. 광대가 툭 튀어나오고 전체적으로 쥐 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매력적이다.
사실 똑같은 느낌의 한국식 발라드 가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처음으로 발라드 가수의 목소리가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많이 예쁜 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옷을 센스 있게 입고 웃을 때 너무 환해서 매력적이다.
나는 예전부터 덕후가 되고 싶었다. 한 사람에게 푹 빠져서 그 사람이 제공하는 콘텐츠에 열광하고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누군가에게 “난 누구누구의 팬이에요”라고 말할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나도 그들처럼 되고 싶어서 열심히 마음 둘 사람을 발굴하고는 했는데, 쉽게 되지 않았다.
조그마한 구설수 혹은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루머만 들어도 가벼운 팬심은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그 사람의 이미지를 보고 팬이 되는 것이니까.
게다가 나는 기본적으로 끈기 있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휘인이라는 아이돌은 근사하다. 예쁘지는 않지만 매력 있다. 이런 가수라면 남몰래 좋아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역시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좀 부끄럽다.
29살 남자인걸. 어쩐지 식도가 간질거린다.
“나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부끄러운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