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아이를 기르며 경험하는 신기함이 있다. 그건 바로 사람 간에 느끼는 생생함. 굳이 단어로 하자면 사랑인데 자기애라고 해야 할까, 인류애라고 해야 할까.
우리 엄마 아빠는 애 가지라는 은은한 잔소리를 할 적에 왜 그걸 빼놓고 연설하셨을까? 그 이야기로 날 꼬셨더라면 내가 적어도 5년이나 당신들의 이야기를 귓등으로도 콧등으로도 안 듣는 일은 없었을 것 같기도(아 아니다... 그래도 난). 아니나 다를까, 먼저 애를 낳은 사람들을 보자니 분명 뭔가 달라진 게 있어도 크게 한 방 있는 것은 같았다.
나는 결혼 전과 후에도 2세에 관심이 없었다. 우리 부부의 자유로운 삶에 더할 나위 없는 사람이었거니와 감각 기관이 예민한 나에게 아이들의 우는(징징대는) 소리는 영 내 삶에 그려지지 않는 판타지 같은 거였다. 굳이 왜?
어느 날 남편이 우리에게도 아이가 있기를 원한다 하여(그것도 내 마음을 지켜보다 결혼 5년 차쯤에) 1년간의 셀프 문답 끝에 하기로 한 것이 2세를 낳고 길러보자는 것이었다. 철회가 불가능한 그 선택의 고민은 훗날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라는 결론이 날 때까지 징그럽게도 해보았다. 나도 나지만 무엇보다 태어날 그 아이를 위해서였다.
임신 과정을 지켜보는 건 생각보다 재밌다. 특히 지나가다 마주치는 할머니들이 내 남산만 한 배를 보며 하시는 한마디는 같은 길을 먼저 걸어본 여자로서의 응원 같아 꽤나 즐겁고 행복했다. 그렇게 30대 중반에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 외롭고 기쁘고 짜증 나고 감사하고 돌아버릴 것 같다가도 눈물겹게 사랑스러운 육아의 길을 통과하면서 '애를 낳으면 대체 뭐가 달라지는지' 몸소 맛볼 수 있었다.
슬프지만 별로 달갑지 않은 변화는 이렇다.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봐도 칙칙해진 피부톤. 헐거워진 뱃가죽의 탄력도. 무엇보다 가장 극적인 건 언제든 누워서 티비보는 한갓짐이다. 두 돌을 앞두고 있는 우리 집 아기에게 이것을 허락받기란 여간 녹록지가 않다. (잠들면 가능)
육아의 본질로 인해 얻은 것들도 있다.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상대(애기)를 돌보는 극고의 노력으로, 본의 아니게 커진 타인에 대한 이해심이다. 어디 가서 그 능력 키우려면 더럽게 고생깨나 해야 가능할 것 같은데 내 애 보면서 생겨난 것이니 이래저래 감사하다.
빽빽 우는 아기와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시기에는 혼이 쏙 빠져 그럴 여유가 없지만, 아이와 물리적으로 떨어짐이 가능한 시절(지난주부터 어린이집에 다닌다)이 오면 문득문득 사랑이란 것을 바라볼 기회가 생긴다. 굳이 의도한 게 아닌데 어쩌면 저절로 그리 된다.
나는 살면서 사랑이란 뭘까에 대한 정의를 끝까지 내려본 적이 없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서도 십분 이해가 되지 않고 나 역시 그들에 대한 감정이 피차일반인지라 이 부분은 늘 미적지근하게 탐구하다 마무리가 된다. 이성과의 사랑은 어떨까. 마음 한 구석에 결핍이 있던 나에게 그건 의지에 가까웠다. 내가 모든 패를 까도 믿을 만큼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어야만 나눠지는 감정이 사랑이었다.(다음 생에는 짝사랑도 실컷 해보리라!)
내가 아는 사랑은 그 정도다. 수준이 좀 미흡한 것 같다. 이 미흡함에 대해 남편에게 이야기를 나누면 그는 "사랑에 대해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네가 하고 있는 그게 그냥 사랑이 아닌 이유는 뭐야?"라고 말한다. 머리를 환기시켜 주는 고마운 그의 일면.
이런 내가 자식을 통해 알게 된 사랑은 아이를 낳고 달라진 여러 변화들 중 가장 색다르다.
이색적으로 느끼는 부분 첫 번째. 아이를 향한 뜨거운 이 마음에 도리어 내가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 좀 괜찮은 사람 같아' 하는 것과도 결이 비슷하다. 자식이니 뭐니 해도 인간이란 역시 자기 자신이 일 번이구나 싶어 그게 약간 부끄럽기도 하지만 인정하면 재밌다.
두 번째. 그렇긴 해도 아이에 대한 마음은 크기에 있어 압도적이다. 그 순간만큼은 '모자람 없이 완전하다'는 게 이런 걸 의미하나 싶다. 밀도 있는 마음이 이 안에 꽉 차있는데 그게 또다시 나를 꽉 차게 한다. 감정주머니의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주머니가 한 치의 부족함도 없이 완전하구나, 확신할 수가 있다. 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이렇게 굳은 믿음을 보인적이 있었나.
이 모든 걸 알아차리는 순간 내 세계가 불현듯 환해진다. 그 사랑을 받을 아이도 그럴 거라고 여기고 있는데 그럴 때면 마음이 뜨겁고 촉촉해진다. 눈이 뒤집힐 만큼 힘들긴 해도, 가끔은 다 때려치우고 도망치고 싶긴 해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경험은 인간에게 있어 사랑이란 게 뭔지 확연히 배울 수 있는 대체 불가의 선택지 같다. 타인을 사랑하는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그게 또다시 타인을 사랑하게 되는 것. 어떤 게 먼저랄 게 없어지는 눈 부신 경험.
지나가는 어른들이 수도 없이 말씀하셨지만 그저 '말'로만 들렸던, 아이를 낳고 키우는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배워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