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기
모르는 걸 타인에게 물어보는 건 어딘가 어렵다. 모르는 게 왜 달리 모르는 것이겠나.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잘 모르겠으니 그제야 모르는 것으로 성립되지 않겠는가. 고로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내어놓지 못하는 때가 있다.
바보 같아 보일 것 같은 마음에 망설여지는 경우도 있다. 그것도 모르냐는 소리에 귀 닫고 싶은 마음과 혹여 상대가 뒤에서 날 비웃지는 않을까? 꼿꼿한 자격지심 탓에 모르지 않다는 얼굴로 머물러 있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관성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았다. 만일 질문에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어떤 걸 어떻게 모르는지 원인을 끝까지 쫓아가 보고 싶었다. 모르는 것과 바보 같은 것을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보고도 싶었고, 특히 '나'를 과하게 의식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다양하게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 이유는 가만히 살펴보면 나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마음을 힘들게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나도 모르게 나라는 것에 잘났네 - 못났네를 운운하며 스스로를 포장하는 허상 같은 것들이다. '나라면 적어도 이 정도 레벨은 해야 해.' '내 나이쯤 되면 못해도 이 정도 옷은 걸쳐야 돼.' '나는 누구 하고도 잘 지내는 사람이어야 해.' 같은 거.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우회가 아닌 정면 돌파였다. 나는 용기를 내 많은 대중 앞에서 법륜 스님께 질문을 청하기로 했다.
일상을 살면서 관점이 잘 안 잡힐 때면 법륜 스님 말고도 질문을 드릴 수 있는 분이 계신다. 법사님이라 불리시는 그분들은 법륜 스님께 체계적인 가르침을 받으며 오랜 시간 수행을 하신 분들이다. 흔치는 않은 기회지만 나 같은 사람이 메일로 고충을 털어놓으면 지혜로운 답변을 주시기도 하고, 공지가 뜨면 구글밋에서 만나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궁금한 게 참 많은 나는 쓸 수 있는 두 가지 카드를 모두 동원해 여러 번에 걸쳐 질문을 드리곤 했다. 위에서 얘기한 이유들이 날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그 스승님들의 스승님이신 법륜 스님께 직접 여쭤보는 건 느낌이 달랐다. 존경하는 분과 대화를 하려니 이유 불문하고 긴장이 됐다. 낯을 가리는 성향상 스님과 대화하는 과정을 몇 백명의 대중이 듣고 있을 걸 생각하니 뇌가 하얘지기도 했다. 질문에 자꾸만 자기 검열을 하는 것도 주춤하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나는 여쭤보기로 했다. 부득이한 상황으로 질문을 못하는 거라면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꼭 묻고 싶은 게 있는데도 스님과 대화하기 떨린다는 이유로 질문을 거둔다면 내가 착각에 사로 잡힌 증표라 생각했다. 그 착각은 '스님은 이런 사람이다 저런 사람이다' 그의 유명세나 명성에 대한 환상 같은 거다. 있는 그대로 보면 스님은 나와 같은 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다. (사람이긴 한데 조금 더, 훨씬 많이, 현명한 사람이라서 그렇지만)
마침내 나는 스님 앞에 섰다. 오로지 내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시는 스님. 떨림과 설렘이 공존했다. 나는 이런 질문을 드렸다.
"스님은 인연 따라 정말 다양한 일(환경 운동, 복지 운동, 사회 운동, 남북평화 운동, 제3세계 난민 지원 운동, 전법 활동 등등)을 하고 계신 줄로 압니다. 해야 할 일이 한꺼번에 몰려있을 때 어떻게 우선순위를 정하시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지금도 여쭈었던 질문을 떠올리면 부끄러운 걸 보니, 나라는 것을 의식하는 마음의 습관은 여전히 힘이 세구나 싶다.
그 질문이 궁금했던 날은 왕복 3시간이 걸리는 포천의 유기견 보호소로 봉사를 다녀온 날이었다. 홀로 서기 하며 비록 수입은 저조했지만 본업인 디자인 일과 지금처럼 글 쓰는 것을 병행하던 초창기 시기였다. 그 밖에 꼭 해야 하는 역할과 루틴 몇 가지가 하루 안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래서 궁금해진 거다. 잘하고 싶은데 할 것들이 많아서 멍해지니까 그걸 잘 일구어 가는 사람에게 비결을 묻고 싶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마음이었다. 도대체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처리하시는 건지 심지어 어떻게 그렇게 높은 성과를 거두시는 건지 궁금했다. 스님이 아니더라도 유튜브만 몇 번 클릭하면 다양하고 화려한 비법이 쏟아진다. 그러나 난 늘 뿌리가 궁금하다. 내 궁금증의 정확한 포인트는 근본적인 마음가짐을 어떻게 현실에 녹여야 하는지였다. 이상과 현실의 적정한 균형 방법이 궁금했다. 그러니 내 질문에 안성맞춤 답을 해주실 분이 스님이 아니면 나에게 누구겠는가.
"그게 궁금할 수도 있겠네요."
입을 떼신 스님의 첫마디였다. 가끔 스님께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안 하고 남 이야기를 하는 질문자에게 '남의 인생에 관여하지 마라.' 라며 단박에 꾸중을 놓기도 하신다. 나 역시 내 이야기를 내어 놓은 게 아니고 '스님은 어떠하십니까' 여쭤봤기에 혼나도 별 수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휴, 혼은 나지 않았다. 내가 질문을 떠올리면 창피한 이유 역시도 내 이야기를 하지 못해서였다. 더욱 좋은 대화가 될 가능성은 구체적인 내 상황과 마음을 꺼내 놓을 때 높아진다. 그게 나에게도 이롭고, 듣고 있던 대중들에게도 훨씬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나는 '나'라는 것의 끝자락을 붙잡았다. 질문은 용기 내서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그 정도 질문 수준이 나의 마지노선이라 판단하고 혼날 것을 감수하며 내어 놓은 궁금증이었던 거다. 궁금한데도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었다. 할 수 있는 만큼 차근차근 연습하기로 했다.
"먼저 큰 서원은 저도 세웁니다. 큰 줄기는 있되, 그 안에서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맞는 것으로 다만 해나갈 뿐이에요. 오늘 이걸 하고 내일 저걸 한다고 해서 뭐가 문제입니까? 질문자도 자기 능력을 잘 살펴서 하나씩 해보세요."
이렇게 답변을 하시며 맥락마다 스님의 경험담을 예시로 녹여 주셨는데 사실 세세하게 기억은 잘 안 난다. 적으면서 들었으면 지금 다시 볼 수도 있고 훨씬 좋았겠지만 너무 긴장이 돼서 스님 말씀을 실시간으로 이해하기에도 바빴다. 심지어 이해를 못한 게 절반은 될 거다. 다른 질문자와 스님이 대화하는 걸 볼 때는 질문 의도도, 답변 의도도 쏙쏙 이해가 됐었는데 어찌 그리 어렵던지. 긴장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이 점점 편안해져 갈 때쯤은 대화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 '자기 능력을 잘 살펴서'라는 말씀이 콕 들어왔다. 아마 표현도 저 문장 그대로였을 거다. 스님께서는 내가 우선순위랍시고 여쭤본 말도 방귀도 아닌 질문 속에서도 내 역량을 믿지 못해 우왕좌왕, 허둥지둥 대는 걸 간파하셨던 것 같다. 되돌아보면 내가 내 능력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지 못해서 뾰족한 수를 구하려는 요량이 마음 한켠에 있었다.
나는 스님 말씀을 따라가며 이해가 어려울 때마다 "스님 이 말씀이신가요?", "스님 그럼 이렇게 여쭤봐도 될까요?" 스님 말씀에 꼬리를 달아 두 번이나 연거푸 질문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급기야 "이제 시간이 다 돼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스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네 감사합니다. 스님"
내 순서는 질문자 8명 중 맨 마지막이었고 계획된 시간 관계상 끊어야 하긴 했지만 어차피 더 설명해 주셨어도 내가 챙긴 말씀은 저 정도 수준이었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질문과 대화는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다. 스님 말씀을 들으며 자꾸만 잘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하려 했다. 대답도 헛소리 안 하도록 잘하고 싶고, 바보같이 보이고 싶지 않아서 잔뜩 긴장했다. '남들에게 여전히 잘 보이고 싶구나. 똑똑해 보이고 싶구나.' 바깥에 붙들려 있는 내 마음과 나라는 것을 고집하고 있음을 날 것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를 고집한 채 듣고 있으니 상대의 말을 이해하는 깊이가 얕았기도 했을 터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나에게 얽매이지 않고자 연습하던 것들이 그때 당시 어느 정도의 깊이였는지, 좌표가 어디쯤에 찍혀 있는지, 중간 점검을 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예전에 한창 갈피를 못 잡던 나였더라면 (질문은 하지도 못했겠지만) 다른 질문자들처럼 얌전하게 "예, 잘 알겠습니다. 스님" 하지 않고 세 번씩이나 질문한 내가 못마땅해서 며칠 내내 그 상황을 곱씹었을 거다. 주로 나를 꾸짖고 책망하면서 였을 거다. 그 심리 저기 저 밑바닥에는 '나처럼 특별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어?'와 같은 잠재의식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나 지금은 내가 별 존재가 아님을 이해한다. 별게 아닌 하등 존재라 여기는 건 아니고, 유달리 특별할 게 없는 존재하는 한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평생 특별한 나를 집착하던 습관이 두터워서 스님과의 대화를 떠올리면 '악 창피해.'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래도 곧바로 돌이킨다. 그간 수행을 통해 얻은 한 생각을 돌이키는 힘으로 ‘그건 내가 만들어 낸 한 착각일 뿐이지.'라고 바로 안다. 돌이키고 나면 내 착각도 알지 못하던 때보다 한결 마음이 편안하다. 세상 쓸데없는 감정 놀음에 일희일비할 때와는 다른 안정감이 있다. 이렇게 비축한 힘으로 스님이 일러주신, 하나씩 해보라는 방법 따라 묵묵히 해나갈 뿐이다.
질문하는 순간에는 스님 말씀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질문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질문을 정리해보던 과정, 질문 순서를 기다릴 때의 긴장감, 질문드릴 때 실수 안 하고 싶던 감정, 마치고 나서 까지.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평생 동안 쓸 수 있는 해답을 얻었다. 나에 대한 집착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난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가볍게 착착 해나갈 수 있겠구나. 이게 자유라는 거구나.
그 마음이 글에 경험 하나 없는 부족한 나에게 이렇게 글을 쓰게 하고 있다. 모르는 것을 묻는 건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 존경하는 스님과의 추억도 쌓았다. 어려우면 친구에게라도, 엄마에게라도 물어야 한다. 상대의 답을 떠나 그 과정 중에 이미 답을 찾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습관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의 마음에서 질문한 나에게도 담뿍 칭찬해 주었다.
"그래. 내 마음과 친해지고 있긴 있구나." 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