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따라 적절한 길 (최종)

인연 따라 편안하게

by 토희

한국인 치고는 김치를 잘 먹지 않는 나와 달리 남편은 유달리 김치 시리즈 음식을 좋아한다. 김치찜, 김치볶음, 김치전... 특히 김치찌개 하나면 따봉을 날리는 남편을 위해 종종 돼지고기를 넣고 찌개를 끓이는데 그 맛의 핵심은 김치의 산미이다. 김치가 얼마나 신지를 잘 알아야 맛있는 맛을 낼 수 있다. 부모님이 주신 이번 김치는 시큼한 편이다. 고기를 먼저 데글라세(전문 용어 뿜뿜)로 볶고 김치를 숭덩숭덩 썰어 넣은 뒤 육수와 함께 끓이다 간을 한번 본다.

'어우 셔.' 이때 도움을 줄 구원 투수는 바로 설탕! 질 좋은 설탕을 한 스푼 넣고 끓이면 감칠맛이 더해져 입에 짝짝 달라붙는 식당표 그 맛이 비스무리하게 나온다. 그럼 그 당분을 얼마나 넣느냐? 글쎄. 그게 딱 이만큼이라고 이름을 매길 수가 없다. 아무렇게나 넣어야 하는 건 아니고 그날그날 김치의 산도에 따라, 육수의 종류와 양에 따라, 집집마다 숟가락의 크기에 따라 '적당히' 넣어야 맛있는 맛이 완성된다.


ⓒ 2021. 토희 all rights reserved.

김치찌개 레시피가 꼭 우리네 같다. 반드시 이렇게 해야 옳다, 저렇게 하면 그르다며 한쪽에 치우쳐 정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막 살 수는 없지 않나. 처한 조건을 요리조리 봐가며 능력껏 내 입맛에 맞는 맛있는 맛을 내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정성껏 만들었다 해도 와이프 기 살려주는 우리 남편이야 two thumbs up을 날릴지 모르지만 옆집 아저씨가 놀러 와 한 숟가락 뜨고는 삽시간에 어색한 기류가 흐를 수도 있다. 아저씨가 먹을 줄 몰라서가 아니고 남편 입맛이 고급도 아니다. 아저씨의 고향 출신과 그 댁 요리 담당자의 손맛, 그의 요리 스타일 같은 총체적인 것들로 그의 입맛은 그럴 뿐이다. 아저씨에게 적당하게 버무려진 세월의 양념 따라 그의 입맛이 결정됐을 뿐이다. 또 내 김치찌개를 매일 먹다 보면 어느새 입맛이 바뀌어서 "내가 왜 이 맛을 몰라봤지? 죄송합니다 토희님." 이라며 느닷없이 쌍 따봉을 날릴지 모를 일이다.


이걸 바로 알면 소고깃집에서 ++ 한우 안심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막내 사원에게 "에이~ 아무개 씨 소고기 먹을 줄 모르네." 라는 꼰대 상사의 말이 나올 수가 없다. 막내는 그렇게 먹을 만한 여러 타당한 이유들이 있었을 뿐, 소고기 앞에서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이란 건 없으니까.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한 내 마음, 오랜 시간 그것과 함께 살았고 쓰디쓴 맛을 보기도 했지만 지금 보니 그 시간들이 나에게 얼마나 귀한가. 그 마음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감은 눈을 조금이라도 뜰 수나 있었을까? 감고 있는 줄이나 알았을까? 오히려 그 아픔으로 나는 내 마음을 확연히 마주할 기회가 생겼고, 감은 눈으로 어둠을 헤매느라 힘들었단 걸 알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하루를 살아도 어떻게 살면 행복할지를 보게 됐다. 그때는 ‘이것만 아니었으면’ 했던 아픔들에 지금은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방황하던 시절에는 예민하게 발달한 내 성향이 불편하기도 했다. 회사 윗사람들끼리 풍기는 미묘한 분위기와 술렁이는 낌새는 왜 나만 알아채는지 동료들보다 먼저 많이 동요됐다. 친구나 상사의 오늘 컨디션이 어떤지 내 눈에는 왜 보이나. 그리고 왜 모른 척이 잘 안됐나. 지금은 다르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있어 예민한 감각은 자산이다. 일상 속에서 쾌하고 불쾌한 느낌 혹은 긍정적 부정적 감정, 평정을 잃거나 들뜬 마음들을 재빨리 알아차리기에 이보다 좋은 습성은 없다. 그 민감한 감각을 키우는 훈련이 명상이고 명상을 할 때 개미 기어가는 만큼 세밀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에는 섬세한 감각을 요한다. 일상 속 둔탁함은 자신의 감정이 일어난 줄도 모르는 새, '아 오늘따라 디럽게 우울하네.' 나를 속수무책으로 사로잡히게 한다.


과거에 찬밥 신세였던 것들이 현재는 다른 처우를 받고, 현재는 금이야 옥이야 쥐고 있는 것도 반드시 그래야 하는지, 그럴 만한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이렇게 가치는 기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그래서 인생에는 절대적으로 좋고 나쁜 것이 없다는 이치를 나는 내가 경험한 삶을 통해 받아들인다.




김치가 너무 시다면 투덜댈게 아니라 설탕을 조금 넣으면 되는 거였다. 국물이 너무 한강이라면 그저 연구를 해보고 소금을 넣는 게 좋은 레시피였다. 놓인 환경을 배제하고 단독으로 상황을 상정해서 반드시 이래야 한다고 할 수 없었던 거다.


그런데 이것을 꽤나 잊고 산다. 이 찌개 맛이 아니라고 시시비비를 가리느라 힘을 뺀다. 맛이 안 난다고 나를 질책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고, 김치 탓이나 설탕 탓을 하며 짜증을 내기도 한다. 그게 과연 그럴 만한 일인가 하는 거다. 그저 지금 주어진 인연을 잘 알아 가볍게 연구하고 나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걸 수행을 통해 이제야 알게 됐다. 이 이치 하나로 내 마음을 맑게 닦아 나가고 있고, 비로소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향기로운 삶을 조금씩 맛보고 있다. 물론 빠져나왔다 하더라도 도통 힘이 센 과거의 습관은 공연히 붙어 있다. 날 불편하게 하는 마음들도 제 멋대로 떠오르지만 그때마다 '아, 지금 어두운 터널에 잠시 빨려 들어와 있구나.' 매일의 연습을 통해 다시 알아차리고 터널을 유유히 걸어 나오는 힘이 생겼다.


부정적인 습관들은 꾸준히 마음을 돌이키면 변화한다. 예를 들면 샤워할 때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을 자꾸만 떠올린다거나 자신의 말을 따라주지 않는 상대를 보면 마음이 들끓는 버릇 같은 것들. 나는 습관을 단박에, 1년 만에, 5년 만에 제대로 한 번 바꿔치기 해보겠다는 마음이 없다. 변하면 감사하고 좋지만, 날 힘들게 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세상은 그대로인데 이 불편함은 내가 지어낸 생각일 뿐이지.' 라고 돌이키는 힘,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무런 변화 없이 지금 내 상태로 살아간대도, 알아차리고 돌이키는 힘이 수행을 통한 수확의 전부라 해도 가슴 뭉클해지게 감사하다. 내 마음이 어떤지, 왜 그런 마음이 일어났는지 알기만 해도 내면은 보다 고요해진다. 마음의 어리석음과 스트레스는 모를 때 즉 '무지'에서 생긴다.


지금 글을 읽는 독자도 당연히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서 이 글을 읽을 것이다. 우리의 생각이란 건 살아오며 형성된 그 삶만의 환경에 따라 생겨난 것이고 그래서 나는 세상을 '내 생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늘 염두하려 한다. 내 말이 옳다고 집착할 만한 게 없고, 반드시 이 결정이 좋다고 고집할 만하지 않다는 것에 순간 깨어 있으려 한다. 그러다 망각하고는 내 말이 맞다고 빡빡 우기거나, 이거 아니면 절대 안 된다며 나를 들들 볶고 앉아 있으면 ‘내가 지금 이 수준이구나.’ 알아차리고 인정한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궁둥이 털고 일어나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한다.


상황마다 적절하고 지혜로운 길이 있다. 나도 잘 모른다. 그때에 맞춰 내 깜냥 껏 나에게 최선의 선택과 책임을 다할 뿐이고 그것이 나도 좋고 남에게도 이로운 길이라면, 기왕이면 그게 베스트다. 지금도 좋고 나중도 좋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이제와 돌아보니, 방황했던 지난날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무 일 없는 게 아니라고 고집한 ‘내 생각이' 나를 힘든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사실을 몰라서, 무지해서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을 애쓰고 살았다. 어떤 게 절대적으로 좋고 나쁜지 알 수 없다. 그러니 눈 앞에 놓이는 걸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나아간다. 내가 정의내린 제대로 된 삶은 이렇게 사는 거였다!

친구와 다투고 어쩔 줄 몰라 하염없이 TV만 보던 아홉 살의 나. 그 옆자리에 앉아 본다. 작은 어깨를 포근히 감싸 안고 이 말을 전하고 싶다.


ⓒ 2021. 토희 all rights reserved.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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