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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결과 초반 3화 몰입의 딜레마

Intelligibility

by 김톨


초등학교 때 얘기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살던 집에는 일본식 다다미 방이 한 칸 있었다. 손님이 없는 보통 때에는 빈 방이자 나의 실내 놀이터 역할을 하는 공간이었다. 책상과 책꽂이가 있었고, 검은색 자개장식이 인상적이었던 더 이상 쓰지 않는 미싱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던 기억이 난다. 거기 책꽂이에는 전혀 다른 성격의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었다.


그중에는 '거부가 되는 길'이라는 책도 있었다. 제목이 특이해서 이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의 처세술 전문가 나폴레온 힐의 책이었다. 한자를 병기하던 시대라서 '거부'가 아니라 '巨富'라고 적혀 있었다. 요즘도 재테크 책 보면 '~~ 하라' 이런 식의 문장들이 많은데, 그 책의 목차에서 비슷한 스타일의 문장들을 봤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구입한 책인지 삼촌들 중 누군가의 책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재테크 책이 잘 팔리는 이유는, 부자가 아닌 사람들이 더 많기 때문이리라. 1970년대에 그런 책들을 열공하면서 다들 성공투자했다면 지금쯤 대한민국 국민들 대부분 부자가 되었어야 될 텐데, 어찌 된 영문인지 재테크 책만 잘 팔리고 정작 재테크에 성공하는 사람은 왜 많지 않은 걸까..


책꽂이에는 3권 셋트로 된 좀 크고 색다른 책이 하나 꽂혀 있었다. 그건 삼국지(三國志)였다. 일반적인 책 사이즈보다 훨씬 컸다. 이제 생각해 보니 A4 사이즈 정도 되는 양장본이었고 상당히 두꺼웠다. 삼국지라는 것만 기억날 뿐 어느 출판사에서 누가 번역한 책인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 당시에도 이미 오래된 책이었는지 판형이 세로 조판이었다. 한자병기에 세로 조판이라 지금의 책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그 책에 얽힌 기억이 하나 있다. 사실 이 얘기를 하려고 한 건데 서론이 길었다. 당시 나는 삼국지를 한창 읽어나가면서 중간중간에 남은 분량을 확인하고는 혼자서 흐뭇해하곤 했다. 무슨 얘기냐면, 삼국지의 극초반 '도원결의' 부분을 읽으면서 이미 나는 소설에 빠져들었고, 너무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두꺼운 책에 아직 읽지 않은 페이지가 많이 남았고, 또 2권, 3권도 아직 읽지 않은 상태 그대로 남아있으니, 어린 내가 보기에 그런 상황이 흐뭇헀던 게다. 마치 맛있게 배불리 먹고 있는 요리가 아직 솥에 엄청 많이 남아있는 그런 상황인 것이다.


오늘 얘기하고 싶은 중요한 두 가지 포인트가 여기에 있다. 하나는 '어떤 이야기에 몰입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몰입에 빠져들어가는 상황'이다.



초반 몰입, 왜 중요한가?


어린 필자가 빠져들었던 세로조판 삼국지는 '있는 책'이다. 내가 구입한 책은 아니지만 어쨌건 내 수중에 이미 있는 책이다. '없는 책'이란 무슨 얘기냐 하면 아직 구입하지 않은 책이다. 서점 매대에 진열된 책일 수도 있고, 온라인 플랫폼의 신작 리스트에 떠 있는 웹소설일 수도 있다. 어쨌건 공통점은 '구매하지 않아서 아직 내 수중에 들어오지 않은 책'이라는 점이다.


'있는 책'을 읽는 독자는 급하지 않다. 어린 필자처럼 느긋하게 읽어나가면 된다. 어차피 구입했으니 안 볼 이유가 없다. 아니 이미 돈을 냈으니 오히려 읽지 않는 것이 손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정말 재미없으면 모를까 일단 '있는 책'은 재미없어도 조금은 본다. 흥미가 있으면 끝까지 가고 없으면 손을 뗄 뿐이다. 그렇다면 '없는 책'은 어떨까?


'없는 책' 중에 오프라인 서점에 있는 책을 생각해 보자. 베스트셀러 코너라든지 아니면 분야별 매대에 가면 마케팅 차원에서 신간이나 스테디셀러들을 따로 진열해 둔다. 딱히 어떤 책을 구입하려고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없다면, 사람들은 보통 여기 있는 책들을 집어 들고 앞뒤 날개 부분이나 목차, 머리말 등을 탐색한다. 이 단계에서 뭔가 필이 꽂히면 구입! 별 거 없으면 그냥 패스다. 오프라인에서 팔리는 책들은 이 단계가 마케팅의 핵심인 셈이다.


온라인이라면? 문피아 또는 네이버 시리즈, 카카오페이지와 같은 웹소설 플랫폼들은 메인화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베스트셀러와 신간, 요즘 뜨는 작품들을 진열한다. 여기까지는 오프라인 서점과 비슷하다. 하지만 오프라인 서점과 가장 다른 점은 온라인 연재소설의 경우 실제 작품의 초반부를 무료로 감상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문피아 기준으로는 초반 25화~50화 정도로 무료편성을 한다. 독자들은 오프라인에서와 같이 목차나 머리말을 보고 구입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작품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정주행 또는 중도하차를 결정하게 된다.


'초반몰입'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무료회차에서 독자들을 몰입시키지 못하면 흥행실패다. 독자 입장에서도 몰입이 된다면 1화당 100원의 비용은 소위 껌값이다. 요즘 100원짜리 물건이나 서비스는 그 어디에도 없다. '몰입'이라.. 마케팅적인 용어로 하면 '후킹 hooking' 또는 '락킹 locking' 과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다.


결국 초반 몰입이 중요한 이유는 온라인 플랫폼의 특성 때문이다. 이것으로 구매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소설작법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비즈니스적인 이유다. 온라인이 없고 오프라인 서점만 있던 시대에 초반몰입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땐 초반몰입으로 구매를 결정하지 않았다. 작가의 명성, 언론 반응, 또래집단의 트렌드와 같은 것들이 중요했고, 그도 저도 아니면 아까 얘기했듯 머리말과 목차다. 기승전결은 소설작법 차원이었지 비즈니스와는 관련이 없었다.



기승전결 Vs. 초반 몰입


이렇듯 초반 몰입이 중요해지다 보니 전통적 소설작법에서 기승전결 부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승전결은 말 그대로 발단, 전개, 절정 그리고 결말로 가는 전형적인 코스다. 사람의 심리구조와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이건 어쩌면 진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초반 몰입이 중요해지다 보니 '기' 부분에서 승부를 내야 되는데, 전통작법에서 '기' 단계는 발단 부분이라 이 단계에서 독자들을 강하게 어필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발단 단계에서 뭘 어쩌자는 얘기인가.. 오늘 포스팅 초반에 사례로 언급했던 삼국지의 도원결의 부분을 예로 들어보자. 물론 도원결의 부분이 아주 유명한 에피소드인 것은 맞지만 그건 삼국지라는 소설이 유명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 그냥 삼국지를 집어든 독자라면 도원결의 부분에서 그리 자극적인 요소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삼국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어릴 적 필자에게 삼국지는 '있는 책'이었으니 초반몰입과 무관했고, 요즘 학생들에게 삼국지는 이미 유명세를 탄 작품이니 작품을 알려야만 되는 비즈니스적 홍보단계가 필요 없을 테다. 삼국지에 관심 없는 학생은 아예 쳐다보지 않을 것이고, 관심이 있는 학생은 초반에 몰입이 되든 안되든 일단 어느 정도까지는 정주행을 할 것이다. 초반몰입보다는 기승전결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신인 무명작가의 첫작이라면? '초반 3화에서 몰입시키기'가 정답이라고 웹소설계에서는 얘기한다. 그래서 신작을 준비 중인 필자의 입장에서도 이 부분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누가 얘기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독자로서 필자의 경험 역시 그런 주장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초반 몰입이라.. 이거 어떻게 처리해야 되나..


좀 더 쉬운 사례는 영화 쪽이다. 이건 좀 오래전부터 그럤던 것 같은데, 다들 알다시피 영화는 보통 초반에 프롤로그(또는 콜드 오픈) 단계를 둔다. 광고가 끝나고 바로 영화 제목을 보여주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흥미로운 장면을 잠깐 보여준 뒤에 영화제목과 출연배우, 제작진들의 타이틀 시퀀스가 이어지는 구조다. 거의 절대다수의 영화들이 이런 구조를 사용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필자의 분류기준으로 영화는 '있는 책'에 속한다. 영화관에는 돈을 내야 입장이 가능하다. 돈 내고 들어온 관객에게 더 이상 비즈니스적인 후킹은 필요 없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프롤로그 단계를 두는가? 이미 낚시질되어서 돈 낸 관객들에게 말이다.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소설과 비교해 볼 때 영화의 특징은 시간제한이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제한된 시간에 관객이 충분한 감정적 소비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된다. 소설은 어느 정도 질질 끌 수도 있지만 그건 시간제한이 없으니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질질 끈다면? 처참한 흥행성적을 감내해야 된다. 그래서 영화의 프롤로그는 제한된 시간 내에 몰입도를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장치로 보인다. 비즈니스적인 목적은 분명 아니다. 이건 좀 소설에서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자극적인 장면 Vs. 이해가능성


이제 초반몰입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고민해 보자. 앞서 영화 얘기를 했는데, 일단 떠오르는 생각은 초반에 가장 새롭거나 자극적인 장면을 배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뻔한 스토리나 감정적 자극이 별로 없는 장면에서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자극적인 방향으로 가다 보면 그 또한 소재가 고갈된다. 막장 드라마가 그래서 나오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너무 잔인하거나 소수취향이거나 19금 쪽으로 가면 폭넓은 독자층을 커버할 수 없는 매니아 장르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매니아 장르는 작가 스스로가 그쪽 분야의 찐 덕후가 아니면 쓰질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자극적인 것이 아니라면 '새로운 것' 또는 '예상치 못한 것'을 동원하는 방법이 있다. '새로운 것'은 말 그대로 지금껏 접해 보지 못했던 소재를 동원하는 방법이다. 어릴 적 보았던 ET 영화라든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같은 영화들은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새로운 소재를 던져주었다. 소재가 참신하다면 주제는 크게 상관없어 보인다. 통상적인 클리셰를 쓰더라도 이야기는 새로워질 수 있고, 그렇다면 독자나 관객들을 자극시킬 수 있다.


소재 면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다면 '예상치 못한 것'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 '클리셰 비틀기'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뻔한 소재라도 생각을 한번 바꾼다면 독자들에게 새롭게 다가갈 수 있다. 네이버 웹소설 히트작 중에 <재혼황후> 라는 로맨스 판타지 웹소설이 있다. 필자는 로맨스 쪽 독자는 아니지만 이 소설은 제목이 너무 재밌고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다. 황후라는 소재도 재혼이라는 소재도 모두 진부하지만, 그 둘을 연결하는 것으로 클리셰를 비틀었다. 새롭고 참신한 작품이 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소재가 되었든 클리셰를 비틀든 이것들을 초반에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좋은데. 이 대목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해가능성 intelligibility'이다. 나는 실제로 신작을 준비 중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 문제의 어려움에 맞닥뜨리고 있다. 말이 쉽지 '새로운 것'이라는 것에는 전제가 하나 깔려있다. '흥미 있고 재미있는' 새로운 것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건 잘 없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보면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잠깐이라도 공부를 해야 된다. 문제는 그 누구도 돈 내고 공부할 생각은 없다는 점이다.


실제로 작가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설명이나 묘사를 했을 때, 독자들이 큰 어려움 없이 흥미를 느끼는 가운데 작가가 연출하는 상황에 흠뻑 젖어들게 만다는 것, 다시 말해서 독자의 '이해가능성'. 바로 이것이 초반 몰입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웹소설 쪽에 '설정충'이라는 용어가 있다. 이건 독자들이 작가를 비하할 때 쓰는 표현인데. 작가 본인의 성격상 새로운 세계관이나 캐릭터를 구상하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디테일에만 몰입하여 독자들의 흥미나 가독성을 생각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기성 프로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자발적으로 무료연재하는 신인들 일부에 한정된 얘기다. 필자 역시 문피아 자유연재 코너를 가끔 들여다보는데, 이런 설정충 작가들이 드물지 않게 눈에 띈다.


사실 설정충 작가는 아주 훌륭한 자질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디테일한 설정이란 것을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것 역시 창의적인 작업이다. 하지만 비난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설정이 디테일하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가독성을 생각지 않고 설정에만 치중하면 독자들이 그걸 공부를 해야 된다. 그러니 욕을 먹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디테일한 설정이 아니라 유료독자들에게 공부를 시켰다는 점이다.


나는 이 대목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작가가 그려가는 세상에 들어올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이해가능성'이다. 작가의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술술 이해가 되면 몰입이 되고, 그렇다면 독자는 그 이야기에 안착할 수 있다. 일단 안착하고 나면 작가가 크게 실수하지 않는 한 작품감상은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해가능성은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을까? 이건 필자도 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른다. 그 부분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전 준비를 하면서 캐치했을 뿐, 솔직히 방법은 아직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 부분은 뭔가 정형화할 수 없는 작가의 총체적인 역량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생각하는 아이디어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친구나 가족들처럼 편한 상대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말로 설명할 때의 방법과 느낌을 떠올리자!


이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으나, 좀 낫지 않을까 싶다.


필자의 실제 준비 작업은 브런치 포스팅과 별개로 계속 진행 중이다. 작업을 하면서 떠오르는 것들을 관심 있는 분들과 공유하기 위해 본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필자가 추구하는 장편 SF판타지 소설에 있어서 시대적 배경, 주요 세력, 주연과 조연, 에피소드, 무협 컨텐츠 활용 및 그에 따른 고유명사 번역 문제 등 여러 가지를 짚었고 이것들은 시놉시스 형태로 구체화되고 있다.


공모전용 단편이 아니라 유료연재를 염두에 둔 장편이기 때문에 한번 연재가 시작되면 낙장불입이다. 미국 로얄로드도 그렇고 우리나라 문피아도 그렇고, 일단 연재가 시작되면 작가는 반드시 연재주기를 맞춰야 된다. 문피아는 최소 주 5~7회, 로얄로드는 주 3~5회가 기본이다. 미리 충분한 회차를 만들어둬야 연재시작이 가능하다. 최소 50화 정도는 비축한 상태라야 연재를 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브런치 포스팅을 잠시 쉬고, 작화와 집필의 시간으로 넘어갈까 한다. 물론 분량을 쌓는 것과 별개로 공유할 만한 중요한 이슈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포스팅을 올릴 생각이다. 하지만 일단 올여름은 넘기게 될 것 같다...



#소설작법 #초반몰입 #장편연재 #웹소설 #SF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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