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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의 빌런은 악적인가 강적인가

Ghoul

by 김톨


대중적인 장르소설에는 뻔하지만 영원한 클리셰 '권선징악(勸善懲惡)'이 자주 등장한다. 나쁜 놈 벌주는 이야기. 시원시원하다. 그래서 나도 주제와 관련하여 구상을 시작할 때 '권선징악'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여기서 출발하여 한 단계씩 구체화시켜 나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악(惡)이란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평상시 머릿속에 거의 떠올려보지 않았던, 악(惡)이란 것!


악은 악인데 뭔가 구체적인 악이 있어야 된다. '악'이란 것을 고민하기 전 나의 원래 아이디어는 '타락한 초인공지능'이었다. 이 녀석이 사람들을 나쁜 방향으로 이끌어 피해자가 다수 발생하고 그걸 정의의 사도가 응징하는.. 한 줄로 적는다면 이런 식의 뻔한 얘기다.


지금보다 훨씬 파워풀한 성능을 가진 초인공지능(AGI)이라면 아직 발생하지 않은 다양한 악행들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새로운 소재라면 대중적인 흥미유발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이건 지금도 유효한 생각이다.


문제는 '악'을 묘사하는데서 발생했다. 악에 대한 큰 고민이 없었을 때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슈였다. 악을 응징하는 것은 좋은데 악을 악처럼 보이게 만들려면 악한 사건과 캐릭터를 만들어서 악을 묘사해야 된다. 내가 생각했던 악행 중의 한 가지는 나쁜 초인공지능 녀석이 미래의 발달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기술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사이버 마약을 전파하고 그것을 무기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숭배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자, 여기까지도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인다. 혹시 일부 예민한 독자분이라면 '사이버 마약' 부분에서 잠깐 갸우뚱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마약'이 되었든 '생체실험'이 되었든 윤리기준 상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설정과 묘사를 할 것이기 때문에 그건 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인공지능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 심플하지만 중요한 가이드를 줬다


예컨대 지금 구상 중인 에피소드의 초반에 난민 수용소가 나온다. 초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일종의 생체실험장이 되는 셈인데. 이게 구체화하면 할수록 윤리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에 대해 인공지능은 여러 가지 얘기를 많이 했지만 결국 요점은 '악'을 정당화하는 것, 즐기는 것, 필요 이상으로 가학적으로 묘사하는 것, 특정 국가 또는 국민과 연결시키는 것 - 예컨대 나치독일과 현대독일 - 이런 것들은 반드시 피해야 될 사항이라고 했다.


그 대신 설정을 잘 만든다면 오히려 긴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도 했다. 결국 이것도 칼을 사람 잡는데 쓸 거냐 돼지 잡는데 쓸 거냐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 내용은 윤리 가이드 예시이다.



악의 묘사방향에 따라 장르가 달라진다


원래 큰 고민이 없었다가 머리가 아프게 된 이유는 '악'을 어떻게 설정하고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소설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악'이란 것은 상당히 난이도 높은 철학적인 주제가 될 수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 '다섯 살짜리 아이가 냇가에서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죽었다'면 이건 악인가? 뭐 이런 주제를 고민할 수도 있다. 만약 소설의 주제가 악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이나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작품이 될 것이다.


또 '순수 악'이란 주제도 있을 수 있다. 진짜 악한 것, 또는 정말 악한 것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영화의 사례를 들어보자면 '살인의 추억' 같은 작품을 떠올릴 수 있다. 오래전 작품이지만 그 연쇄살인범은 진짜 순수악이라고 할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살인의 추억'이라는 작품은 권선징악 클리셰가 아니다. 이건 추리극 및 심리묘사극이다. 완전히 다른 장르다. 통쾌하게 악적을 처단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필자는 악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전면에 등장시킬 생각은 없다. 미래 초인공지능에게서 벌어지는 '악'이란 것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이건 지난주 포스팅에 잠깐 언급했다시피 다양한 소설적 장치들 아래에 고이 묻어 놓을 것이다. 이걸 알아차리는 독자는 감상에 더 흥미를 느낄 테지만, 못 알아차려도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철학소설이 아니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나 괴테의 작품들과 경쟁할 생각이 없다.


악에 대한 추리적인 묘사도 사실 욕심이 난다. 흥미로운 주제다. 하지만 무협과 같은 대중적 장르소설에서 추리물이 성공한 사례가 없다. 이 장르는 독자들의 머리를 좀 아프게 만든다. 보통의 장르소설 소비자들은 머리 아픈 것을 싫어한다. 현실에서 이미 머리가 아프기 때문에 장르소설을 통해 감정해소하는 것인데, 소설에서조차 머리가 아프면 안 된다. 그래서 추리물이 아직은 매니아 장르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필자의 작품을 추리물로 만들지는 않겠지만, 추리적인 요소는 담아보고 싶다. '악'도 단순한 악이 있고 복합적인 악이 있지 않을까? 필자의 작품은 중단편이 아니라 최소 200화 정도의 장편이 될 것이다. 단순한 악이 전부라면 장편 연재가 쉽지 않다. 악을 복합적으로 설정하는 단계에서 분명 추리요소는 중요한 장치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장르소설의 악은 강적!


이 정도까지 생각이 미치다 보니 이제 무협이든 SF소설이든 장르소설에서의 빌런 또는 '악'이란 것의 실체가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장르소설에서의 악은 표면적으로는 살인의 추억의 연쇄살인범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살인의 추억'을 따라가면 그건 추리물이다.


만일 장르소설에서 그 소재를 채택한다면 연쇄살인범이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꼬리를 밟아서 한 판 붙어야 된다. 처음에는 그 끄나풀들과, 나중에는 악의 축이 되는 최종빌런과의 결투가 필수적이다.


결국 권선징악형 장르소설에서의 빌런은 철학적 또는 가학적인 '순수악'은 아니다. 훨씬 간단했다. 장르소설에 나타나는 악의 실체는 '강적'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과거의 많은 무협들을 보면서 '악'을 처단한다고 생각했던 에피소드들이 실제로는 강한 적과 싸운 것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협에서는 정파의 고수가 사파나 마교의 고수들과 일합을 겨루는 장면이 끝없이 이어진다. 과거에 필자는 그것을 큰 고민 없이 권선징악의 '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협에서는 '악'을 철학적 또는 심리적 탐구하고 묘사하지 않는다. 우리가 매일 쳐다보는 포털사이트 뉴스에 사건사고 보도 정도이지 그 이상은 관심 없다. 어떤 악행이 벌어졌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이제 보니 무협에서는 악행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악당을 찾아가서 때리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장르소설의 흥행을 위해서는, 일단 두들겨 팰 악당이 필요하고 또 그 악당은 충분히 강해야 된다. 그래야 이야기가 길게 이어질 것 아닌가. 무협소설의 이면에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마교의 고수가 타락한 정파를 응징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말은 마교인데 나쁜 짓은 전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파가 부정부패에 휩싸이고 배신과 간계에 몸서리를 친다. '악'에 대한 고민은 없고 '강'에 대한 고민만 있었으니 이런 설정이 가능했던 것 같다. 미처 몰랐다. 이런 건 줄.



내게 필요한 것은 강한 악적


이런 사정들을 종합해 볼 때 내게 필요한 것은 강한 악적이다. 충분히 악해야 되고 또 충분히 강해야 된다.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머릿속에 떠올리기 위해 필자는 최근 다양한 영화들을 다시 감상하는 중이다. 일단 시각적으로 볼 때 필자의 '카오모스: 멘티스 임페라'는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과 비슷한 분위기로 구상 중이다. 좀 다르겠지만 그래도 이 작품과 가장 유사한 것 같다.


또 참고한 작품으로 터미네이터 시리즈도 있다. 이 작품 역시 기계와 인간의 대결을 다루는데 철학적 포인트가 많지만 수면 아래에 내렸다. 이제 이런 것들이 조금씩 보인다. 아울러 매트릭스도 다시 봤고, 조만간 아바타도 다시 볼 생각이다. 두 작품 모두 필자가 구상하는 소재와 조금씩 연결이 된다.


영화들을 참고하면서 지난주에 언급했던 무협적 설정과 총기사용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솔루션을 도출했다. 미션 임파서블에서도 어떤 씬에서는 총격적을 벌이지만 또 어떤 씬에서는 여주인공이 검술로 적과 결투를 벌이기도 한다. 이런 방식들을 잘 버무리면 그것도 문제없이 해결될 것 같다.


빌런에 대한 구상까지 진도가 나갔기 때문에 이젠 전체적인 주제, 소재, 주인공들을 유기적으로 엮어서 시놉시스를 만들어 볼 차례다. 미리 만들어 둔 것이 여러 버전이 있는데, 생각을 거듭하면서 자꾸 내용이 바뀌는 관계로 주중에 몽땅 새로 작업할 계획이다. 다음 주에는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전체적인 모습을 한번 보여드릴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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