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취향 1
#서점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책도 좋지만, 그것 보다는 서점이라는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느긋함이 좋다. 분류되어 꽂혀져 있는 책들, 커피향, 고개 숙인 채 집중하는 사람들, 가끔씩 맨발의 아이들이 초음파 소리를 내며 뛰어다닐 때도 있지만, 그 순간만 견디면 이외에 거슬리는 점은 거의 없는, 매우 한결같은 공간이 아닐 수 없다.
#서점에 가면 일단 서점 내 카페로 가 달달구리와 라떼를 시킨다. 책을 읽을 때는 라떼, 일할 때는 아메리카노가 취향이다. 카페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어슬렁거리며 책을 잔뜩 고르러 간다. 이전에는 대부분 업무 관련이나 인문학 책을 선택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엄청 다양한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에세이, 시, 교양과학, 세계사 등.
심리 상태에 따라서 고르는 책이 달라진다는 걸 깨달았다. 기분이 좋을 때는 인문학이나 심리학, 그저 그럴 때는 에세이나 시, 힘들 때는 교양과학이나 세계사 같은 광범위한걸 읽는다. 뇌에 어마어마한 정보가 들어올 때면, 나의 고민이 매우 하찮게 느껴진다. 그리고 정말 죽을 만큼 힘들 때는 엄청 다크한 한국 소설을 읽는다. 한강과 김애란의 소설, 위로가 되는 문체다. 어쩐지 요즘 많이 읽고 있다.
#서점에서 제일 좋아하는 순간은 이렇게 잔뜩 고른 책들을 제자리에 갖다놓을 때이다. '이 책은 원래 어디에 있었더라', 고심한 다음에 한권한권 원래의 자리에 끼워놓곤 한다.
#첫 남자친구와의 첫 데이트 장소가 서점이었다. 약속 장소를 잡으며 반쯤 장난으로 그냥 서점 안에서 서로를 찾아보자고 했었다. 꽤나 큰 대형서점이었는데, 몇분 후 정말로 나를 찾아냈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런 제안에 응하는 사람이 정말 나랑 잘맞는 사람이 아닐까하는. 어렸을 적엔 맘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이런 장난을 줄곧 치곤 했는데, 받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서점 안에서 못 참고 전화를 한다. 어떤 방식이든 사람을 시험하는건 나쁘다고 생각해 지금은 하지않지만, 가끔 그 순간이 생각나곤 한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에게 발견되던 순간을.
#지난 주에는 조카와 서점에 갔었다. 조카와 단둘이 어딘가를 간 것은 처음, 아니, 어린 아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게 처음이었다.(그래봤자 한두 시간 남짓이었지만.) 육아로 지친 언니를 위해, 하루쯤 조카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제안했었다. 조카가 서점을 좋아한다고 데려가 책을 읽어주란다. 신이 난 조카가 가져오는 동화 책들을 쉬지 않고 읽어주었다. 이내 목이 쉴 것만 같아 카페에 가자고 꼬득였다. 초짜 이모의 고단함이 느꼈는지 순순히 따라 나선다. 먹고싶다는 초코머핀을 먹여주는데 얼굴 한가득 묻히고 먹는다. 여러모로 나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 가장 자주 가는 서점은 해운대의 한 서점이다. 개천을 따라 쪼르륵 한참 걸은 후, 높은 빌딩 꼭대기로 올라간다. 이곳 서점 창문을 통해 해운대를 볼 수 있다. 빼곡한 빌딩들 사이로 딱 엄지 손톱만큼 바다가 보인다. 부산에 온지 몇 달이 되었는데, 아직 제대로된 바다를 보지 못했다. 어쩐지 딱 저만큼이 나에게 허락된, 그리고 내가 허락한 이 도시와의 간격같다는 생각을 하곤한다.
#여행가면 그 나라의 헌책방에 꼭 들른다. 운이 좋으면 한국어로 된 책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말 하나의 무게도 버거운 배낭여행자라 여행을 출발할 때, 책은 기껏해야 한두권 정도만 챙긴다. 여행이 지루할수록 책은 금방 읽히고, 그때부터 한국어 책찾아 삼만리가 시작된다. 가끔 포기하고 영어소설을 사곤 하지만, 몇 장 읽다가 금새 포기. 이후로는 현지에서 여행자들이 자주가는 헌책방에 자주 들러 한국어 책이 들어오면 사재기를 한다.
라오스에서 태국으로 건너갈 때 슬로보트를 탔었다. 이틀간 통통배를 타고, 메콩강을 건너가야 하는 길고 긴 장정. 출발하기 전에 동네를 둘러보다가 한 서점을 발견했다. 서점에는 기적적으로 한국어 책 한권이 꽂혀있었는데, 무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환호성을 지르며 책을 지르고, 이틀 동안 꼬박 다 읽었다. 스무살 때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읽었었는데, 그 책이 그제야 읽혔다. 하루키의 여운은 여행 내내 계속 되었다. 헌 책방에서 그 책을 발견한 것은, 그 여행에서 누렸던 가장 행복한 기억이자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