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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므네 Oct 20. 2023

15. 작가님, 오늘 책이 다 되었습니다

현관문 앞에 내 책이 기다리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 날은 더 일찍 일어난다. 요즘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하는 게 자연스럽다.


아침에 모닝페이지를 쓰고, 말씀묵상과 기도를 하고 짧은 운동도 했다. 에세이를 10분 읽고, 휴대폰을 끄고, 노션을 연다. 창밖을 내다보니 아직도 새벽이 일어나지 않았다. 보통 이쯤이면 밖에 산과 잔디 집의 실루엣이 푸르게 드러났는데. 왠지 하루를 번 느낌이다.


글 쓰기 습관 2일 차다. 원래 저녁에 아침에 읽을 에세이를 골라서 책상 위 베이지색 마샬 스피커 옆에 세워 꽂아놨어야 했는데 까먹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에세이를 읽고 싶어서 의자 뒤에 빼곡하게 줄지어 늘어선 책중에 작고 가벼운 한 권을 골랐다. 책을 쓰고 싶고, 쓴 사람의 글. 이런 글은 언제나 내 안에 졸고 있는 그런 사람을 깨워준다. 책을 읽고 어제 읽은 에세이 옆에 같이 꽂아둔다.


어제 인쇄소 부장님께 전화가 왔다. “작가님 책이 오늘 다 되었습니다.” 택배배송은 책에 손상이 생길 수도 있다고 화물을 추천해 주셨다. 여분 책도 45권이나 나왔다고 했다. 일단 양이 어느 정도인지 보시고 판단하시라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셨다(언제나 친절하시다).


더 높이 많이 쌓인 책 더미들 사이에 투명 비닐로 감싼 초록색 내 책 더미가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적어 보일 수 있는 양이지만, 나는 어린이집에서 보내준 사진에서 우리 애 귀여운 것만 보이듯이 내 책 더미가 정말 많고, 귀여워 보였다. 우리 아이가 안전하게 집에 오길 바라며 고민 없이 화물배송으로 정했다. 작은 다마스에 실어서 방금 택배 기사님이 출발했다고 했다. 난 학교에 웹툰 수업을 나가고 있었다. 기사님께 연락드려서 현관 앞에 놔달라고 부탁드렸다.



웹툰 수업 쉬는 시간에 보니 배송완료 인증사진이 왔다. 우리 집 현관문 앞에 가득 쌓인 내 책. 게다가 추석연휴에 주문한 엽서와 스티커 상자도 그 위에 있었다. <용문소로일기> 프롤로그에 적었던 택배에 질식할 뻔했던 장면과 비슷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다 내가 만든 것들이었다. 마음이 작게 일렁인다. 집에 내 책이 기다리고 있다. 수업이 끝나고 차를 타고 가면서 따뜻한 가을 햇빛을 느꼈다.


‘비가 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햇빛에 일광욕을 하고 있을 내 책들. 아이를 원으로 찾으러 갔다가 집으로 가는 마음이 설레고 긴장되었다. 혹시 나무가 책에 올라타고 놀까 봐 가는 길에 집 앞에 엄마 책이 있는데 다칠 수 있느니(책도) 만지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집 앞에는 아까 받은 배송인증 사진의 실물이 있었다. 나무는 책 산을 보며 “우와, 많다!”라고 감탄했다(고맙게도 아까 이야기대로 만지거나 올라타지 않았다).



이번 퍼블리셔스 테이블에 책을 나르기 위해 산 카트를 이용해 책을 집 안으로 날랐다. 엊그제 손목을 다친 터라 조심해야 했지만 내 책을 계속 밖에 둘 순 없었다. 땀이 나고 허리가 아팠지만 내 책을 모두 집 안에 들였다. 정말 많았다. 집에 책 산이 생겼다.


튼튼한 가위를 챙겨 책을 묶은 노란색 노끈을 싹둑 잘랐다. 책을 한 권 꺼냈다. 표지부터 내지까지 살펴봤다.

몇 달 전 책 박람회에서 받은 <출판합니다>라는 무료 잡지에서 읽은 김형진 님의 글이 생각났다. ‘우리는 실패하고 또 실패할 것이다.’ 종이와 인쇄의 기쁨과 좌절에 대한 글.




직접 감리를 봤던 표지와 내지 앞 페이지 색감은 감리대로 잘 나왔다. 그런데 초록색 면지 색은 가제본보다 연둣빛이었다. 뒷부분은 감리를 보지 못하고 기준으로 가제본 한 권을 드리고 왔는데, 인디자인과 집 프린터와 가제본보다 역시 색감이 어두웠다. 어떤 표지는 재단이 좀 밀렸고, 어떤 페이지는 핀트가 좀 어긋났다.

이게 인쇄의 좌절이구나 싶었다. 다음엔 색이 별로 없는 책을 써야겠다. 그런데 어차피 원래 색감은 나만 안다. 사실 인쇄의 좌절 이전에도 수많은 좌절을 극복하며 만든 책이다. 한 달 전, 책을 완성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던 나는 진짜 책을 받아 들고는 겸연쩍게 웃으며 사라졌다. 역시 완료주의가 최고다.


내 책은 이제 세상에 존재한다. 끝도 없는 스크롤의 한 부분이나 메모장의 글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고, 팔 수도 있다. ‘책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던 나는 정말 책 쓰는 사람이 되었다.


첫째 봄이가 책 더미를 보더니 잠시 후 위쪽을 세모로 접고 편지처럼 접은 종이 한 장을 나에게 건넸다. 연필로 ‘용문소로일기… 엄마’라고 쓰고 하트로 꾸몄다.


“봄아, 책 내서 축하한다고?”

“응.”


‘최고’는 어려워서 못썼다고 한다. 나는 꽤 성공한 기분이 들었다. 편지를 작업실 문 안쪽에 붙였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서 편지를 읽는다. 다시 글을 쓴다.



-231011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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