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키므네 Oct 17. 2023

17. 서울 퍼블리셔스 테이블이 끝났다

이제 시작이다

커다란 카트를 털털 밀며, 양평의 깊은 밤을 걷는다. 마지막이다. 준비까지 4일 내내 이 길은 매일 추웠지만 마음은 가로등 불빛처럼 포근했다. 이제 홍대 입구로 가지 않아도 된다니 믿기지 않는다. 관성처럼 또 큰 카트를 밀면서 경의중앙선을 타고 1시간 38분을 가야 할 것 같다.


집에 와 보풀이 잔뜩 일어나고 목이 늘어난 후줄근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동안 엄청난 폐허가 된 집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과 남편 모습이 애처롭다. 빨래를 돌리고 대외용 화장을 지운다. 붕 떠있던 나의 시야가 현실로 내려오니 방금 있었던 일이 진짜였나, 아니 꿈이었나 싶다. 멋진 작가님들과 책 이야기를 하고 비슷한 부스에 앉아서 나도 비슷한 멋진 작가님인 양 내 책을 이야기하고 판매했다. 쓰고 보니 뭔가 엄청난 일을 하고 온 게 맞는 것 같다.


행사 때는 오랜 연습생 생활을 마치고 인기 가요에서 이제 막 데뷔한 아이돌 같은 기분이었는데, 이젠 첫 콘서트를 막 마친 아이돌 같은 기분이 든다. (진짜 아이돌이 아니라 확신할 수 없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결과물로 만들어내고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좋다고 말해주고 응원해 주고…

저번 전시 때도 느꼈는데 꼭 사지 않아도 누군가 내 이야기를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두근두근하고 저릿한 게 있다.


굳이 먼 길을 와서 응원해 준 많은 분들이 있었다. 인스타로 계속 응원해 주시던 작가님들이 오시기도 하고, 복지관 강사님, 밑미로 알게 된 분들도 와서 책을 사주셨다.


가족들도 많이 왔다. 친정 부모님도 오시고, 남편과 어머니, 아이들도 왔다. 봄이는 그날 엄마 책 전시하는 거 본 게 재밌었다고 했다. 나무는 낮잠을 못 자 인사불성으로 와서 엄마 책은 봤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사촌동생이 ‘누나, 샐러드 사갈까?’라고 전화가 왔다. 그때 난 집에서 냉이 구별법 칼질을 하고 있었다. 다른 책들 구경하고 있으랬더니 책에는 관심이 없어서.라고 했다. 그리고는 내 책을 사갔다.


준 가족인 사람들도 왔는데 남편친구오빠는 선물용이라고 내 책도 몇 권이나 사고 우리 부스에서 최고 결제금액을 달성했다. 뭐가 빠졌다고 더 산다기에 그만 좀 사라고 했다. 우리 집 단골 숙박 가족은 예쁜 꽃다발을 주고 저녁에 홍대 맛집에서 같이 밥도 먹었다.(내 책엔 별로 관심 없는 것 같았다)


PDS 단톡방에서도 와주셨다. 동네 산책하다가 서울행 버스가 오는데 안 가면 후회할 것 같아서 급 잡아타고 오셨다고 했다. 한 분 한 분 모두 감동이고 정말 감사했다.


와글이 아니었으면 첫 책은 나올 수 없었다. 은혜로운 기한 속에서 서로를 응원하면서 책을 완성했다. 각자의 역할로 서울 퍼블리셔스 테이블을 준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좋았다. 마지막 날 우리 팀 책을 서로 플렉스(?)하는 시간이 있었다. 집에 가며 읽는데 뭉클했다. 나는 마침내 동료가 아닌 독자가, 팬이 되었다.


첫 책, 첫 페어 참여… 양평역 가로등 아래서 털털털 걸으며 생각한 건데, 내 삶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 계획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유가 있어 태어났고 지어진 대로 쓰일 데가 있었다. 내 불안과 두려움까지도. 우리 집 계단에 줄지어 선 책들도 이유가 있어 태어났고 쓰일 데가 있다. 누군가 꼭 필요한 한 사람에게 내 글이 닿을 거라 믿는다. 이제 시작이다.

이전 16화 16. 몰입은 존재가 아니라 상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