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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므네 Oct 22. 2023

7. 책 편집하러 혼자 호텔에 갔다

남편과 아이들이 없는 800년 만의 개기월식 같은 날

<첫째 날>

남편과 아이들은 태풍이 올라오는 남쪽으로 2박 3일 연수에 간다. 나는 서울에 호텔로 간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짐 싸서 준비시키고 설거지까지 끝냈다. 겨우겨우 차를 태워 보냈는데 전화가 오더니 봄이 텀블러를 가지러 들어왔다. 차 창문 너머로 텀블러를 넘겨주고 집에 들어왔는데, 남편에게 금방 또 전화가 온다. 또 뭐지?


“여보… 행복해야 해.”

“응, 여보도. 살아서 만나자.”


남편과 아이들이 나가고 문이 닫혔다. 조용하고 그럭저럭 깨끗한 집에 혼자 남았을 땐 10초 정도 ‘집에 그냥 있어도 괜찮았겠는데?’ 생각했지만, 아이들이 없는 집은 내일도 있다. 아이가 둘인 엄마에게 아이 없이 혼자 다른 곳에서 외박할 수 있는 날은 800년 만의 개기월식 같은 날인 것이다. 이 귀한 기회를 그냥 보내긴 너무 아까워 이미 일주일 전에 마포의 한 호텔을 예약해 두었다.


왜 마포인가 하면 홍대 상수 근처의 독립책방 투어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책을 내려면 책 편집을 해야 하는데 인디자인을 못 켜고 있다. 독립책방에서 창조의 용기를 채우고 나면 책 편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1박 짐을 케이크 가방에 챙겼다. 짐 가방을 남편과 아이들이 다 가져갔기도 하고. 방수가 될 것 같아서. 노트북을 챙겼다. 예매해 두었던 앙리 마티스 전시가 이번 주 까지라 내일 집에 갈 때 보고 가야겠다. 호텔에 짐을 맡기고 나서 가볍게 홍대 근처 독립책방을 조금 구경하자. 그리고 호텔방에 들어앉아 인디자인으로 책을 편집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이번 여행의 계획이다(쓰고 나니 욕심이 엄청나다).  같이 퍼블리셔스 테이블에 나가는 우리 <와글> 팀 스케줄 상으로 8월 셋째 주까지 내지 완성하기로 했었는데 한 10프로 했을까. 이대로는 내 첫 책이 나올 수 없다. 가족들이 연수 간동안 많이 하고 싶다. 맛집이나 책방은 이제 찾아볼까 한다. 뭐 어디라도 좋겠지.

발등이 까져서 밴드도 붙였다. 나중에 비에 다 떨어졌지만...


공덕역에 내렸다.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호텔을 찾아가는 동안 바지는 다 젖었다. 2시 10분쯤 호텔에 도착했다. 원래 3시 체크인인데 바로 체크인해 주셨다.

일본계 호텔이라 그런지 방은 깔끔하고 작다.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좁은 복도만 남기고 침대 책상 소파들을 테트리스처럼 끼워 넣었다. 고급형 고시원느낌. 창문을 여니 시티뷰. 고용복지센터 뷰지만 개방감 있고 좋다.

창가에 맺힌 빗방울과 사람들이 검정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걸 잠깐 구경한다.

간간히 연수에 간 남편과 아이들이 무사히 갔을지 걱정된다. 남편과 어머니랑 세명 있는 단톡방에 어머니가 '무사히 잘 갔니?'라는 보냈는데 1이 안 지워진다. 혹시 빗길에 미끄러져서… 폭우에 앞이 안 보여서… 사고가 나서 오늘 아침이 마지막이었다면… 은 최악의 상상을 하고 있다. 어릴 때 엄마, 아빠가 늦게 오면 그런 상상을 자주 했던 것 같다.

다행히 4시쯤 남편이 연수 장소에 도착한 해맑은 아이들과 본인의 사진을 보내고 “도착. 태풍 없음.”이라고 보냈다. 감사하다. 일단 오늘 최악의 비극은 없다.


호텔에 짐을 풀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여전히 비는 세차게 내린다. 남편과 아이들은 잘 내려갔을까. 호텔은 공덕역과 마포역 사이. 아까 나왔던 공덕역 방향으로 뭘 먹지 하며 걷다가 그냥 원래 가려던 상수역에 가서 먹기로 했다. 배는 좀 고파도 노트북, 아이패드, 책 몇 권이 든 케이크 가방을 두고 나와 가뿐하다. 상수역 맛집을 찾았는데, 웬만한 집들은 다 브레이크 타임. 꼭 걸리더라. 소바집은 다행히 영업 중이라고 뜬다. 돼지 껍질이 얹어진 메뉴가 있다. 안 먹어본 음식. 이거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는 걸 좋아한다. 나중에 음식을 보면 추억이 떠오르고, 추억이 떠오르면 음식맛도 기억나겠지. 추억이 짝을 이루면 추억을 되살릴 기회도 두 배가 된다.


원래는 줄도 서는 맛집 같은데 너무 시간이 늦어 그런지 손님이 나뿐이다. 돼지껍데기 소바 이름은 아부라소바. 이름도 특이하다. 돼지껍데기를 집게로 집어 가위로 자르고 밑에 소바랑 먹었는데, 내가 생각한 소바맛이 아닌데 너무 맛있었다. 돼지껍데기의 진한 육즙과 부추맛이 환상의 조화를 이룬다. 단지 육류와 채소의 구색맛추기가 아니라 좋다. 수육이나 양배추가 아니라 꼭 돼지 껍데기여야만, 꼭 부추여야만 한다. 조화라는 건 다른 것이 만나 더 좋은 것이 되게 한다. 서로가 서로를 살려준다. 내 입 안에서 돼지껍데기와 부추가 그런 일을 한다.


옆 자리에 젊은 여성 둘이 들어왔다. 나와 같은 메뉴에 돼지껍데기 두 개를 추가한다. 많이 먹어봤나 보다. 아까 뭔가 들어있어 신기해서 찍어둔 다시마 식초를 뿌린다. 나도 끄트머리에 살짝 뿌려본다. 상큼하다! 다시마 식초를 전체에 휘휘 돌려 뿌렸다. 맛있게 먹고 마지막 즈음엔 느끼해져서 좀 남겼다. 얼마 전 자궁 용종 수술하고 받은 점심약을 먹고 일어난다.



아까 우산 쓰고 걸으면서 바지가 푹 젖었는데, 밥 먹고 나왔더니 좀 말라있다. 놀라운 건조력에 감탄하면서 안 그래도 좋아하던 내 바지를 더 좋아하게 된다. 비 오는 날 바지가 젖어도 걱정 없다. 이 기쁨과 고마움은 나만 안다. 바지가 푹 젖고, 금방 마를 때마다 멋진 기분이 든다.  최고의 바지 상이 있다면 꼭 줘야겠다. 오래오래 나와 함께해 주렴.



상수역엔 대충 독립서점이 많을 줄 알았는데 100프로 독립서점을 찾기 힘들다. 한 10분 걸으면 홍대입구역인데 그쪽에 독립서점들이 많은 것 같아 홍대 쪽으로 걷는다. 노트북과 아이패드를 하나에 들려니 무거웠는데 적당한 가방 있음 하나 사갈까 싶다.

옛날에는 홍대에 자주 왔다. 회사를 다녔고, 놀러도 왔다. 첫째를 낳고서도 왔었다. 낯익은 거리, 노후된 건물, 새로운 상점들. 추억이 이곳저곳에 묻어있다.


수술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너무 무리해서 걸었나 싶기도 하다. 근데 독립서점 딱 한 군데만 가보고 싶다. 7분 거리니까. 몇 년 전 봄이 맡기고 나들이 나왔을 때 갔던 연남동이라 반가웠다. 어, 저 자리에 신천지 호객 있었는데 태풍 와서 다들 없네. 길치라서 카카오맵을 켜고 몸의 방향을 돌려가며 겨우 세 번째 서점을 찾아왔는데 또 닫혀있다. 서점 앞에 택배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전화하고 올 걸. 후회해 봤자 뭐 어쩌겠나.




괜찮아. 괜찮다. 독립서점은 못 갔지만 또 다른 재밌는 걸 볼 수도 있잖아. 난 요즘 실망해도 빨리 회복한다. 빠른 긍정력. 기회 하나가 사라지면 내가 지금은 모르지만 또 다른 좋은 것이 올 수도 있다. 홍대입구역을 찾으러 내려가는 길에 큰 문구점을 봤다. 내가 좋아하는 하찮고 귀여운 캐릭터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다. 이거다. 이게 그 지금은 모르지만 또 다른 좋은 것이다. 나의 믿음은 또 한 번 강화된다.


들어가서 엽서와 마스킹 테이프, 내가 만들고 싶은 예쁜 것들을 구경한다. “나도 이런 거 만들고 싶어!’ 에너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또 몇 개를 골라 사 온다. 문구류도 책처럼 마을 어귀 큰 나무 아래 나도 만들고 싶다는 염원으로 쌓아 올린 탑이 될 것 같다.



지하철역에 사람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6시 반. 이제 집에 간다. 오늘의 내 집. 아까 처음 온 호텔이지만 공덕역에 내리자 집에 거의 다 왔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호텔에 와서 신이 나서 오늘 일기를 썼는데 3시간이 지났다. 어떤 날은 한 문장도 안 써지고 어떤 날은 태풍처럼 몰아친다. 오늘 돌아다니며 기록하지 않으면 다 날아가 버린다는 생각을 했다. 내일은 꼭 인디자인 편집을 하자.



<둘째 날> 

이 호텔의 좋은 점 가운데 하나는 체크아웃 시간이 12시라는 것. 지금 11시 15분인데도 여유롭게 아직 뒹굴거리고 있다.

이 방을 나가기 전에 인디자인을 켜보고 나가는 게 목표다. 켜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라는 게 아니라, 켜라는 거야. 벌떡 일어나 지금 모습을 그린다. 조금 망한 것 같아도 계속 그린다. 결국 뭐라도 될 것처럼 그리다 보면 뭐라도 된다.



호텔 요청 사항에 큰 침대, 창가 책상이라 보냈다. 내게 좋은 방의 기준은 ‘작업할 수 있는 책상이 있는가’였다. 책상이 티브이 받침대 겸용이라던가, 손바닥만 한 원형 탁자나 낮은 티 테이블로 책상을 대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호텔은 객실 사진에 창가의 큰 책상이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객실에 똑같이 책상이 있을 것 같긴 했지만 혹시나 해서. 좋은 방의 기준은 다 다르니까.



뷰는 서울 서부고용복지센터(삼창 플라자)와 자이 뷰이다. 차도에 다니는 차를 보니 미니어처 같다. 나무들도 마찬가지. 옆에서 보이는 자연은 하늘뿐이다. 높은 곳에선 아래를 봐야 초록을 볼 수 있구나. 양평에선 시선이 닿은 곳에 늘 초록이 있었다. 창문에 빗방울이 가득해서 지금 비가 오는지 잘 모르겠다. 아, 벽 난간에 물방울이 떨어져 물이 튀었다. 비인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한 번도 켜지 않은 티브이.


퇴실 16분 전, 인디자인 파일을 열었다.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옷을 입는다. 책 페이지를 한번 쓱 보았다. 다시 닫았다. 노트북은 인디자인 책 파일을 한번 열어보기 위해서 가져왔나 보다. 그것만으로도 큰일 했다 싶다. 끝을 인지하면 시간을 매우 밀도 있게 쓸 수 있다. 내가 해야 하는, 할 수 있는 일을 지체 없이 한다. 퇴실 십 분 전, 하원 십 분 전. 삶도 마찬가지다. 오늘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처럼 살지 말자.



<저녁>

앙리 마티스 전시를 보고 집에 왔다. 다시 인디자인을 켰다. 성공적인 책 편집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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