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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이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룩하다


규장각, 리틀정조 양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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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드라마 옷소매 붉은끝동이 인기입니다. 저도 정조이산 선인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예전부터 공부하고 연구해서 책도 몇 권 펴냈는데요, 오늘은 그의 개혁의 산실인 규장각에


대해 다루어 볼까 합니다. 흐흐흐. 사랑만 있다면.....세상에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일도 있어야지. 안 그래요?



규장각은 오늘날로 따지면 일종의 씽크탱크입니다. 조선 역사상 이러한 씽크탱크를 만들었던 왕은 두 분.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입니다.



***



조선의 개혁을 위해 조정에 새로운 물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정조 이산은 세손 시절 송나라 왕안석의 개혁정치를 연구합니다. 그중에서 그는 송나라의 전각제도를 유심히 살펴보는데 자신이 조선 최고의 학자이기에 학자들을 우대하는 정치제도에 관심이 가는 것이겠죠. 송나라 때는 용도각, 집현전, 고문각 등 전각제도가 발달했다고 합니다.



학자들을 우대하고 자문을 구하기 위해 왕이 직접 전각을 짓고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이를 정책에 반영하였죠. 요즘 식으로 하면 정부 연구소라고 할까요? 이런 것들이 다 과거에도 있던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즉위하면 왕을 보좌하는 학술기관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정조 이산은 즉위한 해 1776년 3월, 규장각을 궐내에 창설할 것을 명합니다. 정조실록 1776년 9월 25일 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선대왕의 운장(雲章)ㆍ보묵(寶墨)은 모두 다 소자를 가르쳐주신 책이니, 존신 경근(尊信敬謹)하는 바가 어찌 보통 간찰(簡札)에 비할 것이겠는가?



의당 한 전각(殿閣)을 세워서 송조(宋朝)의 건봉(虔奉)하는 제도를 따라야 하겠으나 열조(列祖)의 어제ㆍ어필에서 미쳐 존각에 받들지 못한 것을 송조에서 각 왕조마다 전각을 달리하는 것과 같게 할 필요가 없으니 한 전각에 함께 봉안(奉安)하게 되면 실로 경비를 덜고 번거로움을 없애는 방도가 될 것이다.



아! 너 유사(有司)는 그 창덕궁의 북원(北苑)에 터를 잡아 설계를 하라.” 하고, 인하여 집을 세우는 것이나 단청을 하는 것을 힘써 검약함을 따르라고 명하였는데 3월에 시작한 것이 이때에 와서 준공되었다.



처음에 어제각(御製閣)으로 일컫다가 뒤에 숙종 때의 어편(御偏)을 따라 규장각이라 이름 하였는데, 위는 다락이고 아래는 툇마루였다.



물론 정조는 자신의 정책을 보좌해줄 기관을 짓는다고 말하지 않죠. 처음에는 단순히 역대 제왕들의 글과 초상화, 유품을 보관하는 건물을 하나 짓겠다고 합니다. 대신들이 이런 발상을 거절할 이유는 없죠. 그래서 정조는 창덕궁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의 언덕을 골라 2층의 누각을 짓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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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덕정>



처음에는 왕실도서관처럼 시작하는 듯했죠. 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자신의 친위세력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당색에 물들지 않은 인재를 선발하되 균형의 원칙을 지키고자 노론, 소론, 남인 중에서 청렴한 인재를 골라 선발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정조시대의 명재상 채제공이니 김종수 같은 인물은 규장각 각신으로 뽑혀 거물로 성장한 경우지요.



정조는 규장각을 자신이 직접 책임지고 관리하고 운영하면서 조직과 기능을 늘려갔습니다. 초기에는 책임자로 제학 2명, 직제학 2명, 직각 1명, 대교 1명 등 6명을 두었고 이들을 칭하여 각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중에 당대 최고의 꽃미남이 나왔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KBS 2 TV, 2010)’ 아시죠? (연식나온다. ㅠ.ㅠ) 거기에 나왔던 아이들이 훗날 규장각 각신이 된다 아닙니까? 노론, 소론, 남인, 또 중인 출신으로 신분과 당색이 다른 아이들이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던 그들이 나중에 각신이 되어 일구어갈 우리나라의 미래가 아름답지 않겠어요? 픽션일지언정 보는 내내 흐뭇했답니다.



당색을 초월한 인재등용에 성공한 정조 이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오른팔이자 왼팔인 홍국영이 괜찮은 제안을 하나 합니다. 정조 재위 3년째 되던 해인 1779년 정조가 도승지 홍국영에게 책자 간행이 어렵다고 얘기합니다.



그때 홍국영이 서얼을 등용하여 교정 등의 업무를 보게 함이 어떻겠냐고 하죠.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심낙수의 『은파산고』에 의하면 홍국영은 젊은 시절 술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모여 놀거나 얘기하기를 즐겨 하고 장기와 같은 잡기를 좋아했다고 전합니다. 글도 잘 썼다고 하는데 그런 탓에 신분이 낮지만 학식을 뛰어난 여러 서얼들과도 교류를 트며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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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지>



마침내 이들을 위한 직제인 검서관 제도가 신설되고 초창기 검서관으로는 이덕무, 유등공, 박제가, 서이수 등이 임명됩니다. 이들은 모두 서얼 출신이죠. 검서관들은 이제 ‘규장각 사검서’라고 불리며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하기에 이릅니다. 사검서의 탄생이 어떤 의미를 가지냐면 조선은 사(士)-농(農)-공(工)-상(廂)의 네 신분제도가 뚜렷하게 나눠진 사회입니다. 이것은 성리학적 질서이기 때문에 이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과 같죠.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차별받는 위치에 있는 서얼들이 가장 똑똑한 인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규장각의 관리로 선발된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신분의 한계를 초월한 것은 아니죠, 그래도 그들의 능력이 일국의 가장 어른인 왕에게 인정받은 겁니다. 이로써 조선 사회는 한층 더 개방적인 사회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죠. 어떤 일이든 시작이 중요한 겁니다. 비록 네 사람밖에 되지 않지만 이들이 가진 능력과 상징성은 경직된 조선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계속됩니다.




출처: 세계최초군주혁명가, 정조이산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468134

세계 최초 군주 혁명가, 정조 이산(李蒜)              

세계최초 군주 혁명가, 정조 이산(李蒜)조선은 성리학적 질서로 이루어진 나라. 양반과 농민, 상인, 서얼, 천민 간의 신분의 구별은 뛰어넘어서도 뛰어넘을 수도 없는 것이 조선의 세계관! 그런 세계에서 그는 서얼이라도 등용했을 뿐 아니라 노비제도까지 격파하고자 했다. 권력의 정점에 위치한 군주가 자발적으로 노비제를 없애려고 한 것은 세계역사상 처음 있는 일. 정조이산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조선최초 도시형 성곽 수원화성. 조선의 왕이란 신분제의 가장 정점에 위치한 존재. 밤하늘의 별들이 북극성을 향하듯, 왕이 있는 곳은 ...


#정조이산 #이산 #정조 # 성덕임 # 정조임금 #정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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