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비밀사관, 은서


第 四 章 정조의 비밀사관

이 세계에 있을 구실을 만들어야 하는 참에 전하의 사관으로 취업하다니. 잘되었다. 나는 교환의 조건으로 노란색 볼펜을 전하에게 건네 드렸다. 그러나 전하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기록하려면 글을 빨리 써야 하지 않느냐? 임무를 다 마치고 더 이상 필요 없을 때 다오.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구나. 김 사관은 내 공식 일정이 끝났을 때 이리 오도록 하라.”

“그때가 언제인가요?”

“인경이 울려 퍼질 때다.”

“인경이 울릴 때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임금이 대답했다.


“밤에 종로에서 종을 28번 칠 거다.”

내 기억으로 인경이라면 열 시나 열한 시쯤 된다는 말인데 왕의 일과가 이렇게나 긴가? 전하는 하루에 잠을 얼마나 주무시는 건가. 설마 안 주무시는 것은 아니겠지? 너무 늦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이곳은 조선. 왕명이 최고인 때다. 왕이 바쁘다는데 내가 어찌하겠는가.

“예, 전하의 명이라면. 대신 저도 한 가지 청이 있어요.”

“뭔가?”

“임금님이라도 봐드리지 않겠어요. 제가 보고 느낀 것을 사실대로 적을 거예요.”

“물론이지. 임금이라고 봐주지 마라. 네가 전해들은 것을 그대로 적어라. 진실 여부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전하, 저를 믿으세요?”

“믿는다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세상에는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닐 터, 나는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다. 너와 내가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하늘의 뜻이겠지.”

“예에.”

“그리고.”

임금은 얼굴을 내게 바싹 갖다 대며 말했다.

“거짓말하기에 넌 너무 허술해 보인다.”


옛날 사람들은 현대인들보다 어수룩하고 어딘가 허술했지만 인간으로서의 품위는 지금보다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조 임금이라고 했던 분은 거의 돌아가실 지경이었는데 나와 대화를 할 때는 항상 의관을 갖추고 예를 다하여 말씀하셨다. 나 같으면 그냥 누워 있었을 텐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여쭈어도 결국엔 다 대답해주셨다. 그리고 눈앞에 계신 이분도 일단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계시다.


나의 무엇을 보고 받아주는 걸까? 속으로는 미심쩍다 생각하실 테지만 그래도 한번 믿어보자고 생각하시는 것이겠지. 정확히 말하면 나의 말을 믿기 때문이라기 보단 나라는 인간을 존중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슷한 일이 21세기에 일어났다면 나는 지금쯤 정신병원이나 감옥에 보내졌을 터이다.


정신병원이라면 중증의 환자로 분리되어 평생 독방에서 나오지도 못하겠지? 언젠가 시골에서 보았던 창살이 드리워진 정신병원이 생각나자 소름이 끼쳤다. 어쩌면 그들이 현대에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조선 시대에 떨어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역사 로맨스 소설 정조의 비밀사관, 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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