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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와 현실 계엄령 사태

by 김글인 Dec 05. 2024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읽고 있는 중이었다. 차분하고도 우울한 문체를 읽어 내려가는 내 얼굴에 어떤 표정이 그려져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거실로 나온 딸아이의 한 마디. "엄마, 인상 좀 펴고 읽어." 모르긴 몰라도 내 표정이 웃고 있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옆구리에 총 맞고 쓰러져 가던 학생들, 애국가를 합창하면서 행진하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문장들에 숙연해진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보였을지도 모른다. 의식하지 못했던 내 눈썹과 입매를 부드럽게 풀어준다고 풀어줬으나, 여전히 경직되어 있었나 보다. 엄마, 인상 좀 펴라니까.


"책 내용이 심각해서 그런가 봐. 절대 밝은 표정이 나올 수가 없네. 노벨상 수상한 한강 작가 책이거든. 5.18 민주화 운동 때를 자세히 써놨는데, 군인들이 학생들을 마구 때리고 죽였다잖아."


책의 한 소절을 읽어주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책 읽다가 자야지, 맘먹은 11시 무렵, 다음 주 기말고사 공부를 하던 중학생 큰 아이가 거실로 불쑥 나와서 전한다. "엄마, 무슨 계엄이 선포됐다는데? 친구들이 단톡에서 난리 났어!"

포털 사이트를 열어 기사를 검색했다. <비상계엄 선포>라는 메인 제목이 줄줄이 눈에 들어온다. 이게 무슨 일이지? 얼른 TV를 켰다. 대통령의 담화 발표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이 밤에? 시계는 1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까까지 엄마의 경직된 표정을 살피던 둘째의 눈빛이 흔들린다. 조금 전에 엄마가 읽어줬던 책의 한 소절에서 계엄군이라는 단어를 분명히 기억할 것이었다. 초등 고학년 사회 시간에 한국 근현대사를 배웠기에 군사반란과 민주화 운동, 계엄령 선포 등의 단어를 알고 있음이 아까의 책 대화에서 느껴졌었다. 민주주의를 '투표'의 이미지로 배운 아이들에게 '계엄'이라는 단어가 소환하는 이미지는 군인들이 시민을 공격하는 장면일 텐데, 방금 전 실제 장면을 묘사한 글을 함께 읽었으니. 취침시간이 지나고 있었지만, 이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닌 녀석은 엄마 옆에서 TV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 너도 역사의 현장을 알아야겠지.


"엄마,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 집에도 군인들이 와서 다 잡아가면 어떡해? 무서워…"


TV에서는 계엄 해제 결의를 위해 국회에 모이는 장면, 헬기가 국회 지붕 위를 날아가는 장면, 총을 든 군인들이 국회에 난입하고 소파로 출입문을 막고 저지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군인들이 국회입구에서 몸싸움하는 장면이 아이들에게도 불안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책에서 읽은 소년의 시선과 아이의 시선이 겹쳐져 내 시야에 들어왔다. 생소함, 비현실적인 느낌, 불안, 두려움, 공포…


실시간 SNS가 가능한 시대에 어처구니없는 계엄령이 얼마나 힘이 있겠냐는 의구심으로 아이를 안심시키면서도, 나 또한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기억하는 첫 대통령은 초등학교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었고, 내가 투표한 첫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2000년대의 시작과 함께 대학 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데모하는 대학생'도 역사 속의 존재였다. <소년이 온다>의 5.18 사건은 1980년으로, 내가 세상에 나오기 1년 전이었다. 나도 교과서에서, 역사적 사실 중 하나로만 알고 있는 '계엄'이라는 게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거지?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민주화를 향한 근현대사를 안다고 자부하던 내가 슬며시 부끄러워졌다.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자행하고 있는 일들을 은폐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온 국민이 알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야심한 밤시간을 틈타 계엄을 선포한 사람의 의도는 뭐지? 의결을 위해 국회로 들어가려는 국회의원이 군경의 바리케이드에 막혀 들어가지 못하고, 군인들을 시민들이 몸으로 막아내는 저 장면은, 세계에서 제일 빠른 인터넷 속도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원시적인 정치가 아니고 뭐지?


"내일… 어쩌면 학교 등교 안 할 수도 있겠는데?"

"정말? 안 가면 좋겠다!"


그러나 계엄 해제 결의가 이루어지고 교육부의 정상 운영 지침이 나오자, 오히려 실망하는 녀석들. 내일을 위해 아이들을 안심시켜 잠자리에 들도록 했다. 내일 학교에 안 가는 게 더 중요한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이러한데, 어른들의 행태는 과연 이런 아이들의 시선을 생각해보기나 했을까. 한강 작가가 5.18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열 살 때였다고 했다. 책을 쓴 건 성인이 되고 한참 후였지만, 어렸던 작가가 접했던 당시의 기억은 지금 내 아이에게 보이는 것처럼 낯설고, 두렵고, 공포스러운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아이는 먼 훗날 오늘 밤을 어떻게 기억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믿기지 않았던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그녀의 책이 세상에 날아올라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와 해외에까지 과거의 폭거를 소환하고 있는 이때,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올바르게 직시하게 하는 현실 계엄령 사태의 발생.

<소년이 온다>와 현실 계엄령 사태가 겹쳐지는 이 우연이, 마치 짜 맞춰진 각본 같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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