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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만파식적을 찾아서

3.1절 맞이 사춘기와 역사 여행

by 김글인 Mar 05. 2025

엄마아빠와 함께하는 여행보다 친구랑 만나서 노는 게 더 좋은 사춘기가 되고부터 우리 집 주말은 각자도생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모처럼 바다 보러 가자는 엄마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으니 더없이 즐거운 일정으로 채워야 한다는 의욕이 마구 샘솟았다. 3.1절이니만큼 뭔가 교육적인 장소를 찾고 싶었지만, 우리 집 소녀들은 이제 박물관이나 전시관은 지루해하는 아이들이었다. 적당히 현실타협을 한 일정을 가지고 집에서 출발했다.


한 시간 남짓 고속도로를 달려 경주에 도착했더니 초입부터 차량 행렬이 어마어마하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다. 늘어선 차들을 피해 석굴암 부처님이 앉아계신 토함산을 넘어 감포 바다로 향한다. 오른쪽으로 냇물을 끼고 달리다가, 야트막한 산과 산 사이에 여백이 느껴지는, 아마도 저 너머쯤이 바다인가 싶은 지점에 이르면 왼쪽으로 쌍둥이 탑이 나란히 보인다. 화려한 간판도 없고,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기다리고 있는 차도 한 대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곳으로 들어서려니,


"여기야? 뭐가 있는데?"

"감은사지."


그래도 우리뿐만은 아니다. 봄나물을 캐서 한편에 펼쳐놓고 팔고 계시는 할머니도 몇 분 계시고, 젊은 커플도 있고, 우리 같은 가족도 있다.


"여기 설명 읽어보자. 역사 시간에 나왔을 텐데, 아주 잠깐 나와서 기억 못 할지도 몰라. 신라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바다에 장례 지내고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로 감은사라고 이름 지었대. 만파식적 알아?"

"음? 들어본 거 같은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초등학교 5학년 사회에서 한국사를 한번 공부했을 테지만 만파식적은 한번 언급되었을지라도 작은 일부분이긴 했다.


"<나는 솔로>를 여기서 찍은 게 있었지."

"아! 그 탑돌이?"


역사 공부로 기억하는 것보다 TV 예능 촬영지가 더 의미 있는 현실 청소년 중3이다. 예능 촬영지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제야 신나게 뛰어가서 나도 탑돌이를 하겠단다. 저 뒤에서 잘생긴 남친이라도 생겨 뒤따라오길 소망하고 있으려나. 이제껏 봐왔던 어느 탑보다도 컸는데, 나 혼자 왔더라면 풍광 좋고 한적한 곳에 앉아서 한참을 바라보고 싶지만, 우리도 한 바퀴 돌며 소원 한 번 빌고는 내려왔다. 할머니들이 펼쳐놓은 나물들 중에 쑥이 보이길래, 한 바구니 샀다. 엊그제 마트에서 한팩 집어온 냉이로 냉이된장국을 끓였더니, 큰 아이가 하는 말.


"흠~ 향긋해. 그런데 나는 쑥국이 더 좋아."

"쑥은 마트에 안 팔아."

"왜?"

"글쎄...... 냉이는 뿌리째 캐는데, 쑥은 뿌리를 끊어내거든. 그래서 너무 금방 시들어버려서인가? 엄마도 모르겠네."


어릴 적 친정엄마를 따라서 종종 봄 들판에서 냉이과 쑥을 캤었다. 딸들도 유치원 시절쯤 외할머니 댁에 갔을 때, 재미 삼아 냉이, 쑥을 캐봤던 적이 있는데, 아직도 기억을 하고 있었다. 쑥과 냉이를 구분할 줄 알아서 이런 시골길을 지나가다가 외치곤 한다. '엄마! 이거 쑥이야! 맞지?'


오묘한 회색빛이 감도는 쑥 빛깔이 모처럼 따뜻해진 햇빛을 받아 예뻐 보였다. 옆에 쌓여있던 냉이도 한 줌 집어 봉지에 함께 넣어주시는 할머니에게 '안녕히 계세요.' 하고 꾸벅 인사하는 딸들에 내 마음이 흐뭇하다.


다음 목적지는 불과 5분 거리. 여백의 미로 바다를 짐작케 했던 방향으로 언덕을 올라가니 너무 초라해 보이는 누각이 하나 있다. <이견대>. 여기는 정말 아무도 없다.


"여기서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받았대. 용이 된 아버지한테서."


냇물이 바다와 만나는 한 켠에 문무왕을 장사 지냈다는 대왕암이 한눈에 보였다. 묘를 만들지 않고 아버지를 장사 지낸 대왕암을 내려다보았을 신문왕을 떠올려본다. 역사와 이어지는 듯한 아련한 기분을 딸들도 느끼고 있을까.


풍광 즐긴 시간 단 1분



다음 목적지는 <송대말 등대>. 별로 안 궁금한 역사를 자꾸 들먹이는 엄마가 별로 달갑지 않을 것이기에, 역사탐방은 이쯤 하고 빛 체험전시관이 있다는 등대를 찾았다. 화려한 비주얼로 따분함을 잊게 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뜻밖의 역사탐방 총정리를 할 수 있었다.



이제껏 들렀던 탑 두 개 달랑 있는 절터에서, 아무도 없는 누각에서, 아마도 귀에 들어왔다가 반대쪽 귀로 흘러나갔을 엄마의 이야기가 미디어아트로 멋지게 스토리텔링되고 있는 것이었다.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 세상을 태평하게 한다는 만파식적을 준 용.


"그래서 만파식적은 어디에 있는데?"

"전설의 피리인거지. 실제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쓰여있다니까 설화로 남아있던 이야기였던 거지. 지금이 2025년인데, 무려 680년이라잖아."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이번 여행에 살짝 끼워 넣은 역사탐방을 화려하게 마무리짓게 되어 아주 흡족했다.


등대 근처의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냈다. 막대기로 건드리면 손을 꼭 잡아주듯이 촉수를 움츠리는 말미잘을 발견하고는 막대기를 하나씩 찾아들고 바위틈을 샅샅이 훑는다. 이런 시간들 덕분에 오늘 하루 핸드폰과 멀리 떨어져 지낼 수 있었던 사춘기 소녀들. 아주 가끔이라도 이런 감성을 바쁘고 치열한 아이들의 일상에 틈틈이 넣어주고 싶다. 한적한 어촌마을 앞 해변에서 세 모녀가 햇볕에 등을 데우며 앉아 찰싹이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산속 계곡물처럼 물속이 들여다보인다. 갖고 놀던 막대기를 바다에 내던지는 둘째 녀석. 바싹 마른 나뭇가지는 파도에 떠서 출렁이며 점점 멀어진다.



"엄마, 저거 만파식적 같지 않아?"


방금 던진 막대기를 가리키며 낼모레 입학식인 예비중딩이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언뜻 단소만 한 크기와 색깔이긴 하다.


"그러네. 진짜 피리 같네. 만파식적이다."


파도에 떠밀려 점점 멀어지는 만파식적. 왠지 묘한 기분이다. 전설의 피리가 아닌, 내 눈앞에 있는 저 피리를 물을 참방이며 얼른 건져내 은은하고 신비로울 피리 소리를 이 하늘 아래 울리고 싶다. 현실 세계, 현실 대한민국을 어지럽히는 온갖 파란을 잠재우고 평화를 불러오는 피리소리. 태평성대를 부르는 피리소리.


돌아오는 차 안에서 딸들에게 물었다.


"오늘 제일 기억에 남는 거?"

"만파식적"


그래, 성공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만파식적을 바다에 던진 저 녀석,

용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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