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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인 Dec 07. 2023

k 장녀의 사춘기

사춘기 딸 vs 사십춘기 엄마

딸아이들과 극장 나들이를 했다. '엘리멘탈'. 불, 물, 흙, 공기를 캐릭터화해서 함께 살아가는 스토리의 애니메이션이었는데, 나는 아이들과 나란히 앉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아이들 가득한 극장에서 몇 안 되는 어른이, 눈물 흘리며 보는 애니메이션이라니. 민망함에 눈물을 훔치는 엄마를 흘끗흘끗 보며 어리둥절한 딸들의 표정이 자연히 따라왔다. 극 중 여주인공에 완전히 감정 이입된 것이 원인이었다. 부모의 가업을 물려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주인공이, 본인의 꿈이 사실은 가족의 꿈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부모의 기대에 반하는 결정을 하게 되고 결국은 꿈을 찾아 떠나는 내용.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꿈을 찾아, 모험 찾아 출발!'하는 식상한 스토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영화 후기를 찾아보니, k 장녀라는 단어가 따라온다. 아, 내가 k 장녀였지. 본인이 속하는 카테고리로서 'k 장녀'를 정의해 본다. '한국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캐릭터로, 부모의 첫 번째 기대를 받으며, 가족의 안정과 분위기를 살피며 책임감을 짊어진 첫째 딸.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도 있음' 정도가 되겠다. k장남 보다 k 장녀가 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장남에게는 경제적인 책임감에 국한되는 데 반해 장녀에게는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책임감까지 얹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엘리멘탈'의 장녀 앰버는 본인의 내면에 예술가의 꿈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혼란에 빠진다. '나의 꿈은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는 것인데, 내가 이상하구나!' 그리고 본인이 느낀 욕구를 억누르려고 애쓴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고, 늙어가는 부모님을 위해 역할을 해내야 한다. 이것이 k 장녀들의 내면이다. 그러니 나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 부모님의 기대를 받는 모범적인 장녀였다. 넉넉하진 않은 형편에도 삼 남매를 키우시는 부모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초등학교 때부터 생각했던 걸 보면 아주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다. 동생들을 챙기고, 부모님의 심기가 불편하거나 집안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상황을 살피며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부는 알아서 잘하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불편했던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었고, 그런 내가 의젓하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에게 응석을 부리거나 나의 욕구, 필요 사항을 부모님께 요구하는 게 어려웠을까, 딱히 나에게 사춘기라는 시기가 기억나지 않는다. 가족 내에서 나에게 주어진 위치의 무게감을 인식하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보다 내 역할에 집중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흔이라는 인생의 중턱에 앉아서 보니, 나는 그동안 뭘 위해 살았나, 내가 원하는 게 도대체 뭔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온다. 이 악물고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내가 올라앉은 이 언덕이 허탈함으로 쌓인 모래 언덕 같다. 사춘기는 반항과 방황으로 버무려진, 나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하고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라는데, 나의 사춘기가 그랬던가? 아니, 나에게는 그런 사춘기가 없었다. 부모님 속 안썪이고, 내 할 일 잘하는 착한 딸, 그게 나였다. 부모님에게도, 주변 어른들에게도 그것으로 칭찬을 받았으니까. 나의 정체성은 그것이었나보다. 허허, '착한 딸'이 나의 정체성이라니.


 내 꿈은 뭐였지? 꿈이랄게 있었나? 간절히 하고 싶은 게 뭔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인생의 중반기에 정체성을 고민하는 지금, 나는 뒤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는 것 같다. 이른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는 사춘기를 요즘은 중2병이라고들 표현한다. '사춘기가 벼슬이냐, 나 때는 말이야. 사춘기를 그렇게 별나게 겪어가며 부모님이 챙겨줘 가며 살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나는 내 아이들의 사춘기에 벌벌 떨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더랬다. 그러나 뒤늦게라도 이렇게 사춘기를 겪게 되는 걸 보면, 사춘기는 꼭 필요한 것이구나. 4살 아이들이 내가 할래!를 외치는 것처럼, '내 인생, 내가 고민하고 계획할래!'라는 외침이 사춘기임을 깨닫는다. 그 사춘기를 온전히 겪지 못해 이제 와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이 시기가 아프긴 참으로 아프다. 그러니 우리 아이들에게는 온전한 사춘기를 보낼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모가 어떤 성향이냐에 따라 가정마다 다양한 분위기가 존재하겠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순종적인 기질이어서 스스로 반항보다는 순리를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혹시나 내 아이가 본인의 주어진 역할에 얽매여 있지는 않은지, 부모의 요구가 지나치진 않은지 항상 살펴야겠다는 다짐도 따라온다.


영화 속 앰버는 나와는 달리 정상적인 사춘기를 겪으며,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정한다. 딸의 고백을 들은 아버지는 당황하고 얼마간 노여워하지만 결국 딸의 꿈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꿈을 향해 떠나는 앰버가 아버지를 향해 마지막으로 절을 올리는 장면에서 나를 포함한 많은 k장녀들이 눈물을 흘렸다. 울분의 눈물인지, 후회의 눈물인지 모를. 사실, 어떤 부모가 자식의 꿈을 짓밟고 싶어 하겠는가. 본인의 꿈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 결코 자녀를 위한 것이 아닌 본인의 욕심이었음을 깨닫는 과정 역시 부모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용기가 부족했음을 인정해 본다. 나의 사춘기를 누군가가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부모의 기대와 나의 역할을 저버릴 용기가 부족해서 내 부모님이 부모로서 한 단계 성장할 기회를 내가 빼앗은 건 아닌지.


칼 융에 의하면 "마흔이 되면 마음에 지진이 일어난다" 고 한다.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니 많은 자기계발서에서 마흔이라는 나이를 위기의 시기라고 하는 등, 주변에서 마흔이라는 단어가 나를 조준하고 달려오는 듯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인다. 비단 k 장녀가 아닐지라도 많은 마흔넘이들이 지난 날 사춘기를 치열하게 보냈던가 되짚어 봄 직하다. 지금이라도 치열한 사춘기를 누구보다 성숙하게 보낼 기회가 남아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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