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딸 vs 사십춘기 엄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자존감'이라는 개념을 알게 된 지 대략 10년이 채 되지 않은 것 같다. 밀레니엄 학번인 나는 대학 생활을 하던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자존감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뒤돌아보면 20대도 철 모르는 애였으니, 그 시절에 자기 계발서 같은 데 관심이 있었을 리도 만무하고, 개념적인 지식 유무와 관계없이 나의 심리적 건강 상태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지고 우리나라에도 조금씩 심리학 관련 서적이 서점에 비중 있게 자리 잡게 되면서, 그리고 내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삶의 문제와 독서에 심취하게 되면서, 나의 자존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됨이 아닌가.
나의 자존감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은 두 딸아이가 유아기를 지나 학교에 가던 즈음인 것 같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육아를 위해 10년간의 경제생활에 마침표를 찍을 때도, 남편의 손을 빌리지 않고 독박으로 육아를 하던 때에도, 나는 눈앞의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바빴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 따윈 없었다. 언젠가부터 화분 키우는 재미가 생겼었는데, 한 지인이 말했다.
"네가 이제 애들이 커서 여유가 생겼나 보구나?"
아하, 화분에 꼬물꼬물 변화가 생기는 게 기특해서 키워내는 게 재밌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에너지를 쏟을 곳이 아이들에게서 화분으로 옮겨간 것이었구나.
입시를 향해 달리던 중고등 시절, 자유롭기도 했지만 미래와 취업을 고민하던 대학 시절, 치열하게 고민하며 이어가던 직장 시절을 거쳐 결혼과 출산, 육아하던 기간까지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아마도 나에게 생긴 최초의 여유로움이었던 그때부터 나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화분에 물 주며, 새로 돋아나온 몬스테라잎에 구멍이 있나 없나 들여다보던 나의 행동이 사실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 들여다본 내면의 내 모습은 한마디로, 외부로부터 인정을 구하는 외로운 섬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에는 학교 성적이나 직업적 성과, 경제적 수입 등의 객관적 지표가 나의 능력이나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나의 자존감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기억하는 내 생애 중 처음으로, 주부라는 위치는 나의 가치를 겉으로 인식할 수 있는 지표가 없었다. 내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사라지고, 대신 가족의 이름 옆에 있는 엄마, 아내, 딸, 며느리라는 단어가 나인 것이다. 소속된 학교나 직장이 없으니, 남편이 승진할 때, 내 아이가 뛰어나 보일 때, 가족 내 나의 역할의 중요성 등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끌어와서 옆에 세워놓고 내 자존감을 은근히 걸쳐놓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크면서 점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고 자유의지를 향해 가는 것은, 기쁘기도 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그나마 끌어다 세워놓은 내 자존감의 지팡이가 축소되고, 또한 내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공허해지는 것이었다.
사회적, 경제적인 지표와 동떨어지게 되는 돌봄 노동자는 자신이 돌보는 대상이 발전할 때 성취감을 느끼며 자존감을 챙긴다. 우리 어머니 세대도 그러했고, 우리 세대도 별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니 내 자존감을 쌓아 올려 주던 아들보다 밑지는 며느리, 내 성취물인 딸보다 못난 사위가 생겨난다. 남의 집 아이들보다 더 뛰어나야 하는 아이들이 양산되고, 경쟁은 더욱 부추겨진다. 그러나 주체를 돌봄 대상에서 나에게로 가져와야 한다. 발전의 대상이 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맛있는 요리를 해서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에서 만족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내 요리 실력이 발전했다는 측면에서 내 성취감과 자존감을 챙겨야 한다. 아이의 대학 입시 결과로 내 성취감을 느낄 것이 아니라 100세 시대의 인생 후반부를 위한 자기 계발에 주력하여 발전하는 것으로 자존감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요즘은 남자 주부도 심심찮게 보이는데, 남녀와 관계없이 정신적으로 건강했던 사람도 주부로서 돌봄 노동 생활을 겪은 후 자존감 문제를 토로하는 것을 보면, 외부의 지표로 자신의 가치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질병인 듯하다. 역할 분담하여 자급자족하던 원시 사회에서의 돌봄 노동자들에게 과연 자존감 문제가 있었을까?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치 있게 여기고 존중하는 마음이 자존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가치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에 이미 충분하다는 심리학, 철학적 의미를 자꾸 되뇌어 본다. 나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 고질병을 가지고 돌봄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집중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