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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인 Dec 07. 2023

너는 사춘기, 나는 사십춘기

사춘기 딸 vs 사십춘기 엄마

내 나이가 늘어간다는 것은 아이도 커가고 있다는 의미다. 사춘기에 접어든 딸은 자유의지로 넘쳐나서 이젠 엄마의 모든 말이 잔소리다. 감정은 또 얼마나 널을 뛰는지, 하기 싫은 걸 해야 한다고 시무룩했던 게 10분 전인데, 갑자기 나와서 개그 댄스를 춘다. 저 시기의 반항과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루에 몇 번씩 나의 감정은 거칠어진다. 사춘기를 온전히 보낼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감정을 잘 다스려 보려 하지만, 세상 힘든 게 감정 노동 아니던가.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짜증 부리며 감정을 쏟아내는 딸이 부럽게 느껴진다. 나도 저 사춘기 시절에 엄마에게 내 감정을 마구 쏟아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혼자 해결했던 것 같다. 그 시절의 내가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감정을 누른 채 사춘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환경과 부모님을 탓하게 되는 못난 마음도 생긴다. 그러니 더더욱 내 딸의 사춘기를 소중히 여겨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늦깎이 사춘기는 딸들의 사춘기보다 순위는 밀려나게 되지만, 아이에게 내 몫을 얹을 수는 없는 일. 마흔이 넘어 겪는 사춘기는 그래서 더 외롭다. 내 감정을 쏟아낼 곳 없이 내가 오롯이 느끼고 해결해야 한다. 나의 이 뒤늦은 사춘기는, 느지막하지만 조금 더 깊은 통찰로 나의 정체성을 탐구한다는 의미에서 '사십춘기'라고 명명해 본다. 사십춘기는 사춘기보다 좀 더 외로울 수는 있으나, 삶의 지혜가 얼마간 축적된 상태에 겪게 되므로 이 시기를 건강하게 겪어내고 나면 더 높은 수준의 내면의 나를 만날 수 있다. 신조어 탄생이다!


세상이 삼모녀 발 아래.



너는 사춘기, 나는 사십춘기구나. 그러고 보니 한 집안에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는 딸이 둘, 남편과 내가 40대이니 사십춘기가 둘, 4인 가족이 모두 질풍노도의 시기인 셈이다. 이거 큰일이다. 위기의 가족이 아닌가. 어쩐지, 언젠가부터 아이들 어릴 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다 같이 모여 앉아도 각자 할 일에 집중하느라 적막하다. 남편의 내면은 어떤지, 어떤 사춘기를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남편만의 고충과 나름의 사십춘기가 있을 것이다. 남의 편의 사십춘기까지 돌보고 싶진 않지만, 위기의 가족을 극복하려면 두 사십춘기가 연대를 해야 하나 싶다. 저 날것의 사춘기들이 무사히 각자의 세계에 안착할 때까지 너의 사십춘기는 안녕하냐고 서로 묻고 위로해야 하나 싶다.



"신은 우리를 외롭게 함으로써 나 자신에게로 인도한다."

사십춘기에 읽는 <데미안>은 좀 다르려나 싶었다. 심오한 문장들 사이에서 간간이 사춘기 때와는 다른 울림이 느껴지는 구절이 있었다. 싱클레어는 외로움이 삶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필연적으로 겪는 외로움이란 것은, 나 자신에 대해 눈뜨게 하기 위한 신의 의도라는 것이다. 싱클레어와 같은 청년 시절에 나도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의 깊이가 나에 대해 눈뜨기에는 너무 얕았던 것일까.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나에게도 더 깊은 외로움의 시기를 마련해 둔 누군가의 의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마흔이 넘어서야 가장 외로운 시기를 맛보면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말이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온 딸이 말했다.

"엄마, 선생님이 우리를 겁주셨어. 너희들 사춘기라고 엄마한테 너무 반항하고 제멋대로 굴지 말라고. 나중에 엄마 갱년기 오면 우리가 반대로 고생한다고, 그때 돼서 후회한다고."

사춘기 아이들에게 '살살 해라'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설득력 있게 경고하시는, 혜안을 가진 선생님이 계시는 듯하다. 사십춘기도 마찬가지다. 심각하게 바라볼 것도, 불만스럽게 바라볼 것도 아니다. 힘 빼고 살살 가자. 한 가지 희망적인 기대를 하자면, 건강한 사춘기, 사십춘기를 훌륭하게 졸업하고 나면 위기의 가족이 얼마나 즐겁고 단단한 가족이 되어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환갑이면 은퇴하여 노인이 되던 시대가 아닌 100세 시대다. 사춘기 한번 겪고 정체성 확립하여 100세 시대를 살기엔 너무 긴 세월이 아닐까. 이제는 직업을 서너 번은 바꾸면서 살게 될 것이라고 하니, 인생의 후반부가 남아있는 이 시점에 제2의 사춘기를 한 번 더 겪어내는 건 어찌 보면, 더 건강한 나, 더 훌륭한 나로 가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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