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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인 Dec 15. 2023

초등 아이의 철학

사춘기 딸 vs 사십춘기 엄마

5학년, 12살이면 이제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이건만, 우리 집 막내인 이 녀석은 몸집도 자그마한 것이 아직도 내 품 안의 아이인 것만 같다. 매일 밤 잠들기 전에도 엄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길 바라는데, 귀찮기는 해도 나에게는 마지막이 될 몇 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매일 밤 나란히 눕는다.


종종 맥락도, 자초지종도 없이 뜬금없는 말을 내뱉는 아이는 이번에도 참 뜬금없다.


"엄마, 그거 알아? 우리가 내일 당장 차 사고가 나서 죽을 수도 있다?"


워낙에 이러면 어떡해, 저러면 어떡해 걱정이 많은 아이라, 또 시작이구나 싶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그렇게 미리 걱정하면 너무 힘들다고, 나도 극복하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토닥여주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나도 그 불안에 공감한 하루였을까, 동조해주고 있었다.


"그래 맞아. 내일 갑자기 강도가 달려들 수도 있고, 아파트가 갑자기 무너질 수도 있고, 갑자기 전쟁이 터질 수도 있지."


이렇게 말하는 나도 이런 불안에 결코 의연하진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겠어? 하며 자조하고 살고 있을 뿐.




여고시절 고단한 고3의 수험생활 시절이었다. 깜깜한 새벽에 등교했다가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가며 공부하던 나의 수험 시절은 한참 밀레니엄을 불안해하는 분위기가 피어나던 세기말, 1999년이었다. 나보다도 키가 작고 땅딸막하던 수다스러운 중년의 국어 선생님이 계셨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아이들의 푸념도 받아주는 편안한 분위기의 수업을 해주시는 아줌마 선생님이셨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00학번이 될 우리였지만, 세기가 바뀌는 시점에 밀레니엄 버그며, 세기말의 공포를 부추기는 종말론 등 순진한 여고생들을 심란하게 만드는 유언비어가 넘치고 있었다. 만만한 국어 시간이 되자, 우리는 선생님에게 토로했다.


"2000년이 되면 세상이 종말 한다는데, 우리는 이렇게 학교에 갇혀서 공부만 하다가 세상 끝나면 어떡해요? 대학도 못 가보고 공부만 하다가 세상이 멸망하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선생님은 피식 웃으면서 어느 집 강아지가 짖느냐는 듯이 말씀하셨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해. 

선생님의 속 시원한 대답을 기대하며 귀 쫑긋 하고 있던 여고생들은 절망했다. 우린 진짜로 진지했단 말이다. 한 반에 50명이 넘던 시절, 교실이 부족해서 지하에 있는 교실 4개를 고3 이과반 4반에게 떠넘긴 시절이었다. 앉아서 공부만 해야 하니 볕 잘 드는 지상 교실도 사치라고 취급받은 설움을, 점심시간이 되면 광합성하러 나가야 한다고 일부러 나가서  햇빛을 쬐고 들어오던 고3 시절이었다. 이렇게 살다가 세상 종말이 오면 어쩌나,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닐까, 2000년이 되기 전 남은 인생 신나게 불살라야 하는 건 아닐까,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했단 말이다.





인생의 쓴맛, 더운 맛 다 겪은 베테랑 국어선생님의 눈에  순진한 여고생들의 진지함은 얼마나 어이없었을까. 물론 일반적인 사건사고가 아니라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맞이한 세기말이긴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두 세 사람만 모이면,  날짜표기가 99-12-31에서 00-01-01이 되는 그 순간, 컴퓨터들이 2000년이 아니라 1900년으로 인식하는 오류가 생겨 인간사회에 대혼란이 올 거라는 불안함을 이야기하던 때였으니. 그래서 2000년을 맞이하던 12월 31일 자정의 제야의 종소리를 듣던 그 순간, 눈 질끈 감고, 다들 숨죽여 '2000년 된 거야? 뭐야? 아무 일 없어?' 하고 허탈했던 기억이 난다. 12살짜리 녀석의 내일 당장 죽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같은 맥락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 같아서 그냥 지나치면 안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맞아. 그렇게 따지면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한 게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는 게 오히려 신기한 거네? 이렇게 잘 살아있는 게 장한 거네. 안 그래?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는 게 기특하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잘 살아가면 되는 거야."


엄마랑 마주앉아 칼국수를 먹으며, 빈그릇에 만들어낸 스마일. 게임금지 당해서 심심하니까 이런 아이디어를 내는구나. 그렇게 웃으며 살면 되지~


아이는 대꾸가 없었다. 전에 이런 불안을 얘기했을 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그렇게 미리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해줬을 땐, 그래도 이러면 어떡해, 저러면 어떡해, 끝나지 않는 제자리였던 것에 비하면, 이번에는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직 생각이 야물지 않은 어린 녀석이 거창한 철학적 결론을 내리야 만무하지마는, 어떤 생각으로 전개됐을지 내심 궁금하다. 아마도 몇 주 후 잠자리에 누워서 또 뜬금없이 얘기를 꺼내겠지. 조금은 더 야물어진 생각의 길이 어떤 방향으로 어떤 얘기를 꺼낼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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